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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문] AI 시대의 국제개발협력,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 _ 강주희 전문연구원
- AI 시대의 국제개발협력,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 젠더 관점에서 본 기회와 위험 강주희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 AI는 개발도상국의 문제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혁신 도구로 주목받으며 국제개발협력 전반에 빠르게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충분한 점검 없이 도입된 AI 기반 개발협력사업은 초기 의도와는 달리 개도국 현지의 불평등과 격차를 심화할 위험을 내재하고 있으며, 특히 젠더 관점이 부족한 AI 사업은 디지털 격차, 데이터 편향, 젠더폭력, 여성과 소수자의 배제를 반복하거나 강화할 수 있다. AI 기반 개발협력은 '여성에게도 기술을 제공한다'는 단선적 접근을 넘어, 협력국의 현지 맥락과 포용적 데이터, 여성과 소수자의 참여, 젠더영향평가를 함께 고려하는 책임 있고 포용적인 사업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들어가며 2022년 11월 30일 ChatGPT가 처음 등장한 이후, 생성형 AI를 비롯한 인공지능(이하 AI) 기술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아우르는 전 지구적 화두가 되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도 AI는 개발도상국이 직면한 문제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 신기술로 주목받으며, 보건·교육·농업·기후식량·안보·인도적 지원 등 전 분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방대한 데이터를 신속하게 분석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자동화 할 수 있으며, 직관적인 자연어 기반 사용환경을 가진 AI 기술은 국제개발협력에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이에 국제기구와 NGO들은 국제개발협력에서 AI 활용 윤리와 포용적 거버넌스를 수립하고 현장에서 다양한 AI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개발협력의 역사에서 기술은 종종 혁신성으로 포장되어 복잡하게 얽혀있는 개발도상국의 사회구조적 문제를 단순한 기술 사용여부의 문제로 축소하고, 현지의 권력관계와 불평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간단한 챗봇처럼 보이는 AI는 실제로 막대한 자본과 인프라, 노동집약적 시스템 위에서 작동하며, 이러한 비대칭은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디지털 격차를 AI 격차로 한층 고도화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특히 AI는 여성과 소수자의 삶에서 성별 편향, 기술매개 젠더폭력, 여성노동의 비가시화, 디지털 역량 격차를 심화할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여기에 AI 설계와 의사결정에서의 여성 부재까지 더해지며, 여성은 현재 AI 시스템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AI 기반 개발협력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기술을 도입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기술이 약속하는 가능성이 누구에게 열려 있고 누구에게 닫혀 있는가, 그 혜택은 실제로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제된 이들은 누구인가이다. 본 글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AI가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국제기구의 동향과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AI에 내재된 불평등의 층위와 그것이 성평등 의제 및 개도국 여성의 삶에 미치는 위험과 가능성을 검토한 뒤, AI 시대의 국제개발협력이 성주류화를 어떻게 다시 설계해야 하는지 점검해본다. AI라는 새로운 의제: 국제기구 움직임 최근 국제기구와 공여기관은 AI for Good, 책임 있는 AI, AI for SDGs 등의 의제를 내세우며 AI에 대한 논의를 제도화하고 있는데, 이는 크게 윤리, 거버넌스, 기구별 실행의 세 가지 축으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윤리적 차원에서는 2021년 UNESCO가 193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채택한 '인공지능 윤리 권고'가 인권, 평화와 정의, 다양성과 포용성, 환경의 4대 가치를 중심으로 첫 글로벌 표준을 제시했고, 이는 2024년 OECD AI 원칙 개정으로 이어지며 분야별 윤리 지침으로 세분화되고 있다. 거버넌스 차원에서는 2024년 UN총회의 AI 안전·신뢰 및 국제협력 결의안과 미래정상회의의 글로벌 디지털 협약(GDC) 채택2, 2025년 출범한 'AI 거버넌스에 관한 글로벌 논의'와 'AI 독립과학패널'을 통해, 그간 소수 선진국에 집중되어 있던 논의 구조를 다자적 플랫폼으로 재편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ITU 주관으로 40개 이상의 유엔 기구·파트너 기관이 참여하는 ‘AI for Good 정상회의’에서는 AI 표준, 데이터 및 인프라 전략, 또 보건·농업·기후·젠더·역량 강화 등 각 분야별 다양한 AI기반 개발협력 사업사례를 공유하고 있다. 각 기관별 실행 단위에서도 AI 전략과 사업계획이 활발하게 논의 중이다. UNDP는 2025년 ‘SDG를 위한 AI허브를 구축하고 G7과 아프리카 14개 파트너국을 연결해 현지 AI생태계를 지원하는 플랫폼을 출범했으며, FAO도 2025년 디지털 농업과 AI 혁신 로드맵을 발표하며 AI를 통한 농업 시스템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UNHCR은 인도주의 분야 난민과 이주민의 이동을 예측하여 AI를 위기 조기경보와 의사결정 지원에 활용하고, UN Women은 포용적이고 안전하며 신뢰할 수 있는 젠더대응적 AI 강조하며 아태지역에서 UN Women AI School을 통해 여성의 AI 설계와 거버넌스 참여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 ODA와 KOICA도 이러한 흐름에 합류하여, 2026년 시행을 앞둔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에서 'AI 활용 ODA 추진전략'을 발표했고, KOICA는 2024년 인공지능도입계획(2024~2026)과 AI 위원회를 통해 내부 업무혁신과 협력국 AI 역량강화, 한국형 AI의 글로벌 기여를 추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AI 기반 누수 탐지·스마트 물관리 솔루션, 방글라데시 AI 산업인재 양성, UNFCCC와 협력한 AI 기반 기후행동 포럼 등 사업의 외연도 빠르게 확장되는 중이다. 현장에서의 AI 활용: 위기 예측에서 젠더폭력 대응까지 AI정책·전략 차원의 논의와 동시에, 현장에서는 AI를 활용한 구체적 사업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특히 AI는 현장의 문제를 미리 예측·분석하고, 부족한 현장 인력을 보조하며, 더 많은 사람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공여기관과 NGO의 업무를 효율화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AI가 가장 먼저 자리잡은 영역은 위기 예측과 선제 대응이다. 세계식량계획(WFP)의 'HungerMap LIVE'는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95개국 이상의 식량안보 데이터를 기후·안보·위성 데이터와 결합해 기아의 발생을 실시간으로 추적·예측하고 있으며, FAO 또한 동·서아프리카에서 기후 데이터를 농업 계획에 연계하거나 가축질병 발생을 실시간으로 예측하는 시범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AI는 비용과 인력이 많이드는 작업을 자동화하여 개발협력 사업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높이는데 사용된다. UNICEF는 2024년 OpenAI와 협력하여 시각·청각·학습장애가 있는 아동을 위한 접근가능한 디지털 교과서 제작기간을 6-9개월에서 일주일 이내로 줄였으며, ITU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Giga 이니셔티브를 통해 위성영상과 머신러닝 기반으로 정부 기록조차 없는 오지의 학교 위치를 자동 식별하여, 현재 50개국 110만 곳 이상의 학교에 인터넷 제공사업을 효율적으로 제공하였다. 또한 WHO는 개도국의 영상의학 인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흉부 X-ray 기반 AI 결핵 진단 시스템을 결핵 퇴치 전략에 적용했다. AI는 인력이 부족한 곳에서 기본적인 의료·교육·행정·법적 자문을 제공하는 채널로도 활용되고 있다. 케냐의 NGO 자카란다 헬스가 운영하는 PROMPTS는 아프리카 현지 대형언어모델 UlizaLlama를 통해 산모 380만 명에게 임신·출산·산후관리 정보를 제공하고, 하루 만 건 이상의 질문을 처리한다. 또한, Safetipin은 크라우드소싱 데이터와 AI 영상 분석을 결합해 인도 50여개 도시와 전 세계 16개국에서 거리 조명과 보행자 수, 대중교통 접근성 등을 기반으로 여성에게 치안이 취약한 지역을 안내하고 있으며, Chayn은 젠더폭력 생존자를 위해 법률 진정서를 다국어로 자동 생성해주는 AI 도구와 이미지 기반 학대 콘텐츠의 삭제 요청을 지원하는 'Survivor AI’를 약 50만 명 이상의 생존자에게 제공했다. 이러한 생성형AI 기반 서비스는 다국어 번역과 음성 대화 기능을 통해 문해력이 낮거나 키보드·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들도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디지털 서비스가 닿지 못했던 이들에게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Source: World Food Program 홈페이지, Safetipin 홈페이지> AI에 내재된 불평등 요소들: 인프라, 데이터, 역량, 제도 하지만 혁신적인 AI 기술을 제공한다고 개발협력 현장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거나, AI가 약속하는 혜택이 모두에게 고르게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AI서비스는 실제로 고비용 인프라와 방대한 데이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자본·노동·역량·제도의 격차 속에서 작동한다. 또한 AI는 겉으로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으로 보여지지만, 학습된 데이터와 개발에 참여한 의사결정자들의 편향을 반영한다는 점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지적되었다3 (Noble, 2018, Benjamin, 2019, D’Ignazio & Klein, 2020). 따라서 자본과 자원의 불평등, 그리고 편향된 데이터 속에서 성급하게 설계된 AI 사업은 기존의 불평등을 심화하거나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 국가별 글로벌 AI 준비지수, 출처: IMF 2023, UNDP 2025> AI를 둘러싼 개발도상국의 문제는 크게 인프라·데이터·역량·제도의 네 층위에서 나타난다. 우선, AI 모델 개발에는 GPU(그래픽처리장치), 클라우드 컴퓨팅, 데이터센터 등 막대한 인프라 자원이 필요하며, 이는 대부분 북미 선진국에 집중되어 있어 또 다른 종속을 야기할 수 있다. 실제 아프리카 대륙은 글로벌 데이터센터의 약 2%만 보유하며, AI 인력 중 약 5%만 AI 개발에 필요한 컴퓨팅 자원에 접근할 수 있다 (UNDP, 2025). 게다가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기와 물을 사용하는데, 많은 저개발국이 지역 주민에게 필요한 전력·식수 공급도 어려운 상황에서 데이터센터 입지의 환경·자원 부담을 떠안게 된다. 둘째, AI 현지화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도 부족하다. 개도국 현지 언어로 된 AI 학습데이터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현지 문서를 디지털화하더라도 처음부터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인구는 데이터에서 비가시화되거나 잘못 분류된다. 이렇게 배제되는 이들은 주로 개발협력의 우선 대상이 되는 여성, 최빈층, 농촌주민, 이민자, 소수자일 경우가 많다. 기존 병원 환자기록나 모바일 사용 데이터, 학교 성적 등으로 학습된 AI모델로 서비스를 개발하면, 애초에 병원에 잘 오지 못했던 사람들,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 학교를 중퇴하고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어린이들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특히 여성의 무급 돌봄, 육아와 가사노동, 소작농 노동, 가정 내 의사결정 등은 고용·금융 기록과 같은 공식 데이터에 잡히지 않는다. 토지·계좌·휴대전화·사업체 명의가 남편이나 남자 형제 이름으로 등록되는 경우에는, AI 기반 금융 신용평가나 사회보장 맞춤형 서비스의 지원 대상 선정에서 여성의 니즈와 활동이 실제 AI 알고리즘 상에 축소 반영되게 된다. 셋째, AI 역량격차가 심각하다. AI를 현지 문제에 맞게 활용하려면 서비스 사용 능력 외에, AI를 개발하고, 운영하고, 점검하고, 오류를 수정하고,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현지의 기술·제도·시민사회 역량이 필요하다. AI 생태계의 젠더 격차는 선진국 차원에서도 심각한 수준이다. 전 세계 AI 연구자 중 여성은 12%, AI 학계 교수 중 여성은 16%, AI 스타트업 임원 중 여성은 18%에 불과하며, 글로벌 사우스 출신 AI 연구자의 비율은 이보다 현저하게 낮다(UNESCO, 2024). 기본적인 인터넷·모바일 사용격차와 젠더격차의 중첩 또한 지속되고 있다. ITU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전 세계 약 22억 명이 여전히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았고, 개도국의 인터넷 사용률은 35%, 모바일 보유율은 57%에 머문다 (ITU, 2024). 모바일 중에서도 생성형 AI 앱이 작동되는 스마트폰 보급률은 이보다 훨씬 낮으며, 여성의 사용률은 더 낮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모바일 인터넷 사용률은 남성 53%은 여성 39%, 남아시아에서는 남성 68%은 여성 43%로 나타난다(GSMA, 2024). <지역별·국가별 인터넷 사용 젠더격차, 출처: ITU Facts and Figures 2025> 특히 여성은 기기 소유와 데이터 비용을 감당할 경제력, 돌봄으로 인한 시간 부족, 교육기회나 문해력, 사회 규범에 따른 이동 제약, 온라인 괴롭힘과 안전 문제 등 중층의 사회적 제약 속에서 기술과 마주한다. 여성 농민을 위한 AI 농업정보 서비스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고, 시장에 이동할 수 없으며, 농산물 판매 수익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면 정보 제공만으로 소득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성보건 AI 챗봇도 임신·출산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여성이 병원에 갈 교통비와 가족의 허락, 안전한 의료기관, 신뢰할 수 있는 의료진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실질적 건강권 개선은 제한적이다. AI 시대 이전에 구조적 격차와 디지털 격차가 누적되어 있는 상태에서, 신기술의 등장은 그 격차를 강화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지 사회가 AI 시스템을 검토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수정할 수 있는 제도적 격차도 존재한다. AI를 도입한 현지 사회는 AI에서 오류나 편향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여 개인정보 보호, 차별금지, 알고리즘 책임성 규정, 피해 구제 절차 등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특히, 생성형 AI는 딥페이크, 이미지 기반 성폭력, 온라인 협박 및 괴롭힘을 증폭시키면서 기술매개 여성폭력의 규모, 속도, 익명성, 자동화를 강화하고 있으며, 충분한 규제와 안전장치가 없다면 기존의 젠더 편향과 차별을 증폭할 수 있다(UN Women, 2024). AI 기술은 젠더폭력 대응 신고와 상담서비스를 쉽게 제공할 수 있게 하지만, 피해자의 안전, 익명성, 보호시설, 법적 지원, 보복 방지 체계가 함께 마련되지 않으면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기술중심주의의 반복된 실수 AI는 새로운 기술이지만 이를 개발협력에 도입하는 방식은 컴퓨터와 모바일 등 정보기술 기반 개발협력(ICT for Development)이 수십 년간 반복해온 실수들을 그대로 답습할 위험을 안고 있다. 개발협력의 역사에서 기술은 종종 빈곤·교육격차·보건 접근성·젠더불평등·농업위기 등 구조적 불평등과 다층적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문제를 ‘정보 부족’이나 기술의 ‘접근성 부족’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현지 역량이 충분치 않은 기술협력 분야에서, 현장의 문제들은 외부 전문가의 단기 출장과 답사를 통해 ‘어떤 기술을 제공할 것인지’의 문제로 재정의되고, 선진국에서 개발된 기기와 앱·플랫폼·기본 교육 등이 현지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그대로 이식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들 사업의 성과는 다운로드 수, 사용자 수, 교육 참여자 수와 같은 정량 지표로 더욱 단순화되어 평가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작 그 기술이 무엇을 해결하려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해결했으며,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갔는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들은 누락되기 쉽다. 이러한 접근은 신기술의 긍정적 영향만 부각한 기술중심주의(Technocentrism)와 기술이 쉽게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술해결주의(Technological Solutionism)에 기반한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Toyama, 2015; Morozov, 2013). 기술중심주의는 정보기술의 혁신성이 구조적인 문제를 우회할 수 있고, 현지에 기술과 정보만 제공된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전제한다. 기술해결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잡한 사회 문제를 마치 수리 가능한 기계적 결함처럼 다루며 앱 도입과 같은 단순한 처방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로 치환한다. 저개발국 아동에게 노트북(OLPC)만 쥐어주면 교육 격차가 해소되고, 농부에게 모바일로 날씨 정보와 가격 정보를 알려주는 앱만 제공하면 소득이 증가하며, 여성에게 모바일과 온라인 창업교육을 제공하면 가부장적 경제 장벽을 넘어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제공된 앱과 정보 서비스들은 현지 문화·맥락에 맞지 않아 낮은 사용률에 머물거나, 근본적인 불평등 문제를 완화하지 못한 채 사업 종료와 동시에 유지·보수가 끊겨 중단되는 사례가 반복되었다(Heeks, 2018; Unwin, 2017). AI도 기술의 혁신성에만 집중하고 현지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제공될 경우, 이와 같은 실수를 더 광범위하게 반복할 위험이 있다. AI 사업은 과거 ICT 시범사업보다 훨씬 빠르게 확산되고 깊이 침투할 수 있으며, 알고리즘 블랙박스의 특성상 현지 사회가 점검·이의제기·수정할 통로도 더 제한된다. 따라서 AI 기반 개발협력에서 중요한 질문은 ‘어떤 기술을 도입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그 문제가 정말 AI로 해결 가능한지, 문제 해결에 누가 참여했는지, 그리고 기술 도입후 현지 사회의 불평등이 실제로 완화되었는지이다. AI시대 국제개발협력 성주류화의 재설계 개발협력에서 AI의 위험은 기술 자체뿐 아니라 기술을 도입하는 방식에도 있기에 문제 정의부터 사업 평가까지의 전 사이클에서 포용성과 평등, 책임성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젠더 불평등의 문제는 단순히 AI 사용자 성비를 따지는 체크리스트 수준으로 다뤄져서는 안된다. 여성은 개발협력 수혜인구의 절반이자 보건, 교육, 소규모 농업, 비공식 상업에서 활발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개발협력의 핵심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니즈와 참여는 AI논의에서 쉽게 누락되거나 형식적인 성비 체크 정도로 축소되는 경우가 많다. UN Women에 따르면 138개국의 국가 AI 전략 중 젠더를 언급한 국가는 24개국, 실질적인 젠더 반응적 조항을 포함한 국가는 18개국에 불과하다(UN Women, 2024). 그동안의 성주류화가 '여성에게도 기술을 제공한다'는 일차원적 접근에 머물렀다면, AI 시대의 성주류화는 AI가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평가되는 전 과정에 젠더 관점을 통합하는 일이어야 한다. 우선 기술 도입보다 젠더 관점을 고려한 포용적 문제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AI로 해결하려는 문제가 ‘누구의 관점에서 정의되었는지’ 또 그 문제를 정의할 때 ‘어떤 대상이 포함되고 배제되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문제 정의 과정에서 여성이 마주한 구조적 맥락(무급 돌봄과 가사노동, 시간빈곤, 의사결정권과 이동의 제약, 재산권 차별, 폭력의 위험, 차별적 사회적 규범 등)이 충분히 고려되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AI 사업은 기술 솔루션을 먼저 정해 놓고 현장에 적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사용자가 어떤 구조적 장벽 속에서 문제를 경험하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AI 기술을 통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설계되어야 한다. 둘째, 접근성 확대를 넘어 실제 사용 가능성과 안전을 점검하여야 한다. 여성과 소수자는 기기 소유, 인터넷·모바일 데이터 비용, 문해력, 시간, 가족의 통제, 온라인 폭력의 위험 때문에 기술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다. 따라서 단순히 서비스 보급을 넘어, 누가 실제로 접근할 수 있는지, 누가 이해할 수 있는지, 누가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왜 배제되는지를 함께 점검해야 한다. 셋째, 성별분리 데이터를 확장해야 한다. AI가 여성의 니즈를 반영하려면 성별, 연령, 장애, 지역, 소득, 이주 여부 등 교차적 조건을 반영한 데이터가 필요하며, 특히 기존 데이터에 포함되지 않은 무급 돌봄노동, 비공식 노동, 여성의 안전과 이동권 등 기존 통계 데이터가 놓치고 있는 영역을 가시화할 필요가 있다. 한편, 임신·출산·생리주기, 젠더폭력 피해, 위치정보, 생체정보처럼 민감한 데이터의 사전동의, 익명화, 삭제권 등 통합적 정보 보호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넷째, 여성과 소수자를 AI의 공동 설계자와 의사결정자로 위치시켜야 한다. 여성을 수동적인 취약계층 사용자나 교육해야 할 대상으로 한정하기보다, 실제 기술 설계, 데이터 수집 기준, 위험 평가, 운영 방식, 피해 구제 절차 등 AI 사업 전 과정에 현지 여성단체, 젠더 전문가, 장애여성, 청소년 등 다양한 집단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젠더영향평가와 AI영향평가를 결합하여 사업 시작 전부터 성별에 따라 위험이 발생하는지, 데이터에 편향이 존재하는지, 알고리즘 오류가 누구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지 점검해야 한다. AI는 개발협력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지만, 그 가능성이 곧바로 포용적이고 성평등한 개발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AI시대의 성주류화는 '여성에게도' AI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사업 전반에 협력국의 현지 맥락, 포용적 데이터, 여성과 소수자의 참여, 젠더영향평가, 피해 구제와 책임성을 함께 설계하는 것이다. 그것은 책임 있고 포용적인 AI 사업을 만들어가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3대 AI 강국’을 목표로 삼고있는 한국은 AI를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삼고, ODA에서도 AI와 디지털을 강화하는 흐름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형 AI ODA가 기술 수출, 사업 효율화, K-AI 확산, 선진국 따라잡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서구 공여국들이 디지털 개발협력에서 반복해온 기술중심주의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 있다. 한국의 AI ODA가 여성을 포함한 모두의 삶을 의미 있게 바꿀 수 있는 책임 있고 포용적인 AI 사업을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 참고문헌 Benjamin, Ruha (2019). Race After Technology: Abolitionist Tools for the New Jim Code. Polity. D'Ignazio, Catherine, & Klein, Lauren F. (2020). Data Feminism. MIT Press. Molnar, Petra (2024). The Walls Have Eyes: Surviving Migration in the Age of AI. The New Press. Heeks, Richard (2018).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for Development (ICT4D). Routledge. Toyama, Kentaro (2015). Geek Heresy: Rescuing Social Change from the Cult of Technology. PublicAffairs. Molnar, P. (2024). The walls have eyes: Surviving migration in the age of AI. The New Press. Morozov, Evgeny (2013). To Save Everything, Click Here: The Folly of Technological Solutionism. PublicAffairs. Noble, Safiya Umoja (2018). Algorithms of Oppression: How Search Engines Reinforce Racism. NYU Press. UNDP (2025). The Next Great Divergence: AI and the Acceleration of Global Inequalities. https://hdr.undp.org/content/human-development-report-2025 UNESCO (2024). AI and Gender Equality Outlook Study. https://unesdoc.unesco.org/ark:/48223/pf0000388902 Unwin, T. (2018). Reclaiming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for development. Oxford University Press. UN Women (2024). Placing gender equality at the heart of the Global Digital Compact. https://www.unwomen.org/en/what-we-do/digital-empowerment/global-digital-compact UN Women. (2024). Innovation and technology. UN Women – Asia-Pacific. https://asiapacific.unwomen.org/en/partnerships/innovation-and-technology Waid, L. (2021). Tracing the untraceable: New technologies that monitor displaced persons and the history of population control. Published on 2021, May 24, Harvard International Review. https://hir.harvard.edu/new-technologies-that-monitor-displaced-persons/ 필자 약력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영국 런던시티대 국제커뮤니케이션과, 미시간주립대 미디어정보학 박사를 거쳐 UN-ESCAP/APCICT, UNU, CARE/USAID 등 국제기구에서 디지털 포용과 젠더, 역량강화 정책을 연구했으며, 캘리포니아대 산타크루즈(UC Santa Cruz)에서 디지털 창업과 사회변화를 가르쳤다. 현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에서 포용적 AI, AI 정책의 젠더적 영향, 국제개발협력을 연구하고 있으며, 여성정책연구원 객원연구원, 아시아위민브릿지 두런두런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젠더연구소 관리자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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