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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연세대 영문과로부터 받은 ‘위대한 유산’ (76 오진숙) (2008.06.28)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연세대 영문과로부터 받은 ‘위대한 유산’


76 오진숙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소설집을 뒤적이다 The Legacy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디킨스 소설 제목도 떠오르며 내가 연세대 영문과로부터 받은 ‘위대한 유산’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영문학을 하려면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기독교를 알고 성경을 알아야 했다고. 물론 정작 기독교에 대해서도 성경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바가 극히 미미하다. 하지만 영문과에서 그것도 미션 스쿨인 연세대의 영문과에서 소설과 시와 희곡을 읽어가며 나는 어떤 한 가지 이슈가 나도 모르는 사이 계속 나를 따라 다니고 있었음을 어느 날 문득 발견했다.


‘원죄’라는 문제였다.


아마, 호손의 『주홍 글자』, 멜빌의 『백경』, 존 단의 시 등을 읽고 배우며 그 문제가 나를 스토킹하기 시작한 것 같다.


처음엔 나는 그것에 대해 영 시비조였다. 기분이 나빴다.


‘아니, 이만하면 그런대로 착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original sin이라니!’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이미 갖고 태어난 ’원조 죄‘가 무의식속에까지 속속 내장되어 있다고?’


말만 들어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중죄인이 되는 것 같아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형이상학 시인들” 코스를 들었다. 거기서 배운 구체적인 시 작품은 기억이 아물거린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이신 조신권 교수님의 말씀 한 마디가 가슴에 남았다. 정확한 표현은 생각나지 않지만 “겸손은 지금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비슷한 내용이었다. ‘지금 있는 그대로’가 가슴에 남았다.


나름대로의 다사다난한 삶의 여정을 지나오며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향한 지름길이라는 화두가 내 삶에 던져진 것은 분명 영문과로부터 받은 유산이다. 병이 나으려면 우선 아프다는 자각이 있고 그리고는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한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더라도 내가 힘들다는 자각이 없으면 그에게 다가갈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보니 나는 수시로 힘들어 했고, 괴로워했고, 아파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의 바탕에는 유전인자처럼 내장되어 있는 마음의 나쁜 습관들이 있었다. 원죄였다. 고장난 마음이 있었다. 조금만 살펴보아도 어느 틈에 눈 깜박하지 않고 십계명이나 사랑의 계명의 정반대를 행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증오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늘도 무심하시지’하는 원망심이 들고, 부모가 원망스럽고, 상대를 이해한다 하면서 너무 미워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것이 보였다.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하는 마음 뒤 쪽에는 배가 아픈 것이 보였다. 친구가 평수를 두 배 늘려 이사 간다는 전화를 받고 ‘어머, 축하해’하면서 그날 밤 복통을 앓았던 일이 생생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교만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것이며 겸손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교만의 소치이다. 나는 미움이라고는 모르는 사람, 나는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즉 원죄 따위는 없는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있으므로 미워하는 자신이 미운 것이다.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난 아직 성인(saint)이 아니다.


원죄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얼마나 마음 편히 정화와 성화의 길을 갈 수 있는지. 원래 끼어 있는 때를 씻어 내어 가니 얼마나 하루하루가 발전이고 행복인지. ‘복된 죄’(felix culpa)까지는 아니어도 원죄를 안다는 것은 분명 마음 편케 해주는 그 무엇이다.


청소를 하려는 사람은 먼지를 보고, 청소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다 깨끗한데 뭐’라고 하며 먼지를 보지 않는다. 맑고 맑은 원래의 마음에 혹은 신의 이미지(the image of God)에 끼어있는 원죄라는 때를 본 사람은 그것을 닦아내기 시작하는 사람이다.


결국 성현들은 아픈 사람 보고 아프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셨고 흙 묻은 사람에게 흙이 묻었다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신 분들이다. 있는 먼지를 없는 줄 착각하고 있다가 어쩌다 그것이 보이면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코메디다.


괴로움은 그런 착각에서 온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가령 자신의 영어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인정하는 사람은 실력향상을 위해 열심히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만 있을 뿐 괴로움은 없는 것과 같다. 일거수일투족에서 내 현재 실력인 원죄를 읽어내면 낼수록 그만큼 더 분명하고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가 이런 종류의 경험과 사색의 단초를 얻게 된 것은 연세대 영문과와 여러 은사님들로부터 받은 소중하고 소중한 ‘위대한 유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