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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나의 학창시절 (76 유호경) (2008.06.28)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나의 학창시절


76 유호경




대학을 졸업한 후 어느덧 30년이란 긴 시간이 흘러갔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기생들이 한껏 웃을 수 있는 빛바랜 사진이 하나 있다. 처음 대학에 입학하여 교수님들을 모시고 본관 건물 앞에서 찍은 76학번 동창생들의 기념사진이다. 두꺼운 뿔테안경을 끼고 고등학교를 막 졸업해 짧은 머리를 한 남학생들의 모습과, 당시 유행하던 긴 생머리에 나팔바지를 입고 멋을 내긴 했지만 어딘지 어색한 여학생들의 모습은, 늘 우리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했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들의 눈가에도 주름이 지긋해졌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롭기만 했던 학창시절이 어느덧 큰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영문학과 학생이 되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문과대학 건물(지금의 본관)의 돌계단을 힘차게 올라가던 시절, 우리학과 학생은 모두 35명으로 강의실에 둘러앉으면 한눈에 전체 출석인원이 파악되었다. 게다가 남학생 18명에 여학생 17명이라는 알맞은 남녀 비율로 과모임을 가질 때면 마치 소개팅 나온 분위기처럼 짝지어 앉곤 했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이면 본관 앞 둔덕 위에 다 같이 모여앉아 수다를 떨었고, 남학생들의 재담과 과대표의 즉흥적인 모임발표를 들으며 마냥 즐거워하던 우리들이었다. 76학번 동기들은 개성이 강한 친구들로 남학생들 중에는 신학 분야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유난히 많았고 드문 일이지만 동기커플도 한 커플 탄생했다. 또한 당당히 본교의 영문과교수가 되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동기생도 있다.


지금은 많은 대학이 학부제로 학생을 선발해 2학년이 되어야 전공을 선택하지만, 그 당시는 과별로 모집을 하던 때였다. 이미 분리되어 나간 교육학과와 사회학과도 그때는 문과대학에 속해 있었다. 어느 과나 소수의 인원인지라 한 건물을 드나들며 타 학과 과목을 수강하게 되면, 다른 학과 학생들과도 쉽사리 친숙하게 지낼 수 있었다. 다른 학과 학생들하고도 친구가 되기 쉬웠으니, 같은 과에서 4년 동안 얼굴을 마주치며 강의를 함께 듣던 동기생들 사이의 유대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던 영문과 체육대회를 통해 선후배 간의 정을 쌓았고, 연세인의 가장 큰 축제인 연·고전에 참여할 때는, 우리학과 친구들끼리 모여앉아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쉬움을 함께 했었다. 경기가 끝나면 어깨동무를 하고 시가지를 걸어 다니던 뒤풀이의 즐거움 역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76학번 동창들의 재학시절인 70년대 말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 집권 말기로, 4학년 재학 중에 발생한 10·26대통령 시해사건과 졸업하던 해의 5·18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격변기였다. 경제적으로도 근대화와 경제개발을 앞세운 산업화로 고도성장을 이루었지만, 값싼 노동력을 대가로 얻은 성장 뒤에는 많은 근로자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한편에선 재벌 계층이 형성되었지만 산업구조의 변화로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은 도시 빈민층으로 바뀌어 갔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이 있듯이, 유신체제를 통해 18년간 지속된 권력 독재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의 열망과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각계각층에서 시작되었고, 대학가에서의 끝없는 시위로 이어졌었다. 학교 바로 뒤에 살고 있었던 나는 집에 가는 길에는 전투경찰이 도열해 있는 사이를 긴장하며 걸어갔고, 시위가 있는 날이면 집 마당으로 최루탄 포탄이 날아 들어올 때도 있었다.


이렇듯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우리들은 주위로부터 ‘선택받은 자’란 소리를 들었었다. 실제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직하는 경우가 많았고, 같은 나이 또래지만 낮에는 공장을 다니며 고향에 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밤에는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야학’에서 배움을 계속하는 소위 ‘공순이’란 소리를 듣던 근로자층이 생겨났었다. 사회적 비판소설로 아직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바로 이 시기에 힘겹게 살아가던 민중들의 삶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생회관 앞 대자보에는 늘 언론탄압이나 구금된 대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의 고문실태, 또 농민운동이나 노조운동에 대한 탄압 등 가슴 저린 소식들이 실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한 번쯤은 ‘상아탑 안에서의 학문에의 전념’과 ‘적극적 사회’참여라는 현실적 요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 마련이었다. 백양로를 걸어 내려갈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들으면 왠지 숙연해졌고, 학내 깊숙이 들어와 주변을 맴도는 정보부원들을 보며 느끼던 분노는 꼭 noblesse oblige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외면하며 살 수 없게 하였다. 이 시기에 ‘지식인의 침묵’에 대해 나름대로 내가 찾은 해법은 ‘작은 나눔의 실천’이었다. 단짝 친구와 함께 사회의 낙후된 시설을 찾아다니며 시작한 봉사활동과 짧은 기간이었지만 근로자를 위한 야학교사로 활동한 것은 나를 내면적으로 성장시키는 소중한 체험이었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고민하던 사회 참여는 지금처럼 이념색이 짙은 한총련이나 민총련과 같은 사회단체를 태동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고통분담과 나눔의 철학’의 실천을 통해, 산업화 초기에 깊어만 가는 ‘계층의 양극화’란 갈등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고, 나라의 지도자 역할을 할 엘리트계층의 참여를 촉구했던 것이다. 고통스런 격동기를 살아가던 우리에게 대학은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을 정립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할 길을 모색하게 했던 학문적, 인격적 수양의 공간이었다. 요즈음은 대학입학이 전 국민의 목표가 될 만큼 대학교육이 많은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청년실업 탓에 대학이란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학문을 탐구하기 위한 곳이기보다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할 하나의 통과의례로 여겨지는 듯 해 안타까운 일면이 있다.


그래도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이라고 했던가? 시위 때 학교 깊숙이 전투경찰이 들어와 학생회관에서조차 곤봉을 휘둘러대고, 최루탄 가스에 고통스러운 눈물, 콧물을 짜낼 때였지만, 70년대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맞물린 기업들의 투자로 졸업 시기가 되었을 때 취직 걱정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학생회관 앞이나 상대 건물 앞에 붙어있던 플래카드에는 현대, 삼성, 대우 같은 대기업에서 직접 대학을 찾아와 신입사원 모집 설명회를 하는 안내 공고가 적혀 있었다. 영문학과 역시 외국계 은행, 기업, 대사관 등 취업의 문이 가장 넓은 과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부모님께서 ‘평생직장’이라며 교직과목을 수강하도록 권유하셨을 때, 나는 마지못해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었다. 그러던 내가 결국 평생직장을 교사로 갈아타기는 했지만, 요즈음처럼 시대 상황이 변해 정년이 보장되는 교직으로 경쟁이 집중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사실 나는 일·이학년 때는 영문과 학생이라기보다는 항상 ‘客’처럼 밖으로 돌아다니던 비주류(?) 영문과생이었다.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과연 영문학이 이 시대를 풀어가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었고 영문학도로서의 정체성을 찾느라 방황한 시간이 길었다. 얼마 전 영어영문학과 홈페이지에 들어가 교수님들의 이름을 훑어보며 세월의 흐름을 한 번 더 실감했다. 76학번 동기들이 강의를 들었던 고맙고도 그리운 은사의 성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강의 시간 외에 개인적인 만남은 별로 없었지만 오랜 세월 몸에 배어있는 향기처럼 감동어린 강의로 우리를 성장하게 도와주셨던 교수님들, 그 교수님들 중에는 이제는 작고하셔서 함께 할 수 없는 나의 아버지도 계셨다. 밀턴의 『실락원』을 가르치시던 아버지의 강의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영문학과를 다녔다.


우리 세대는 거의 대부분 ‘아빠’보다는 아버지가 익숙한 세대였다. 막내딸로서 자란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기 어려웠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막상 영문과에 들어왔을 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을 느꼈었다. 이미 나보다 먼저 영문과를 졸업한 언니는 영자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며 상당히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했기에 소심한 아웃사이더였던 나와 많이 비교되었다. 또한 그때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신진교수님들이 많이 강단에 오르던 때였다. 자연히 아버지를 포함하여 기존에 강단에 오르시던 노교수님들의 위상이 많이 약화되었고 두 세대 간의 보이지 않는 구분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그래서 나는 더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어했다. 돌이켜 보면 좀 더 긍정적이고 넓은 안목을 갖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아쉬울 뿐이다.


실제로 중·고등학교 시절 세계문학 전집에서 읽은 몇 작품 외에는 제대로 아는 것도 없이 영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다 보니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기만 하였다. 그러나 2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전공과목을 들으며, 문외한이던 나도 조금씩 문학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Shakespeare의 sonnet을 소리 내어 읽으며 한 소절 한 소절을 가슴으로 느꼈고, Frost의 Mending Wall을 읽으며, 삶에의 강렬한 의지를 담은 Blake의 시를 통해 내 삶의 작은 열망들도 하나하나 타오르기 시작함을 느꼈다. 원한광 교수님의 ‘영문학사’를 비롯해 여러 교수님들의 명강의는 철없는 망아지 같은 한 소녀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었다. 세상의 여러 사회현상과 갈등을 이해하는 데는 정치학이나, 경제학, 사회학도 중요하지만, 문학의 힘이 무엇보다 크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 조성규 교수님의 미국문학 강의를 들으며 Hawthorne의 주홍글씨가 바로 내 가슴에 새겨진 양, 작품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서 감동을 느끼던 시절, 어느덧 내 영혼에는 ‘성숙’이란 글자가 새겨진 듯했다.


지금도 문학작품을 읽다가 눈에 익은 주제인 ‘difference between reality and appearance’의 문제가 다루어지면 학창시절 Shakespeare의 비극 작품을 공부하던 때가 생각난다. Cordelia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한 Lear왕이나 Iago의 간교함에 빠져 순결한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던 Othello의 모습은 때론 나의 자화상으로 또는 타인의 이미지로 형상화 될 때가 많다. 권력에의 욕망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저버리고 왕을 살해한 Macbeth가 “Will all great Neptune’s ocean wash this blood I Clean from my hand?”라고 내뱉던 독백은 그가 저지른 죄악이 그만큼 크고 돌이킬 수 없음을 그 어떤 웅변보다도 강렬하게 전달해주었다. Macbeth와 대조적으로 “A little water clears us of this deed”라고 이야기했던 Lady Macbeth가, 끝내 자신의 손에 묻은 ‘stain’을 지워내지 못해 미쳐버려 자살하게 됨은, Shakespeare가 날카롭게 간파한 인간의 도덕성의 강한 힘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개인의 도덕성의 무너짐이 결국 우주전체 질서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연결고리에 깊이 공감하며 느꼈던 감동은 나에게는 인식의 새 지평을 열어주는 것과 같았다. 내가 영문학과 학생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던 값진 깨달음과 통찰을 통해 나는 영문학에 새로운 흥미를 갖게 되었고,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감수성은 무디어졌지만 얼마 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 코너를 빠짐없이 읽으며 학창시절의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나의 그리운 76학번 동창생들 역시 불멸의 작품들을 읽으며 느끼던 그 모든 감동의 순간순간을 잊지 않고, 보석처럼 찬연히 빛나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할 수는 없지만, 멀리서라도 그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의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함께 한 소중한 학창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세 동산에 남아 있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 속 ‘서시’의 한 구절은―‘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이제는 너무 부끄러워 읽기조차 힘들지만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으며 가슴에 담았던 그 시절의 아픈 추억은 분명 우리들만의 공감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연세 영문학과의 60년을 맞는 감동어린 시점에서 76학번 동기생들 모두에게, 그리고 시대는 달랐어도 60년에 걸쳐 영문학의 향기를 함께 공유해 온 영문과 대 선배님들과 후배들에게 동문이 된 고마움과 기쁨을 전하고 싶다.


연세 캠퍼스에서의 가슴 설레던 학창시절이 나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문학적 감수성’과 ‘세월의 흐름에도 퇴색하지 않는 나눔의 철학’이었다. 이 두 가지 선물은 모두 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셨던 아버지 덕분에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 철부지 딸이 생전에 해드리지 못했던 “아버지 사랑해요.”라는 말과 함께, 돌아가시기 전까지 낡은 나지막한 나무 소반 위에서 작품을 쓰시며, 일생동안 문학의 향기를 전하고자 하신 아버지의 초창기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분명 아버지께서도 연세 영문학과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계실 것이다.



自畵像


柳 玲




콩나물 시루 안


일곱 식구 단간방에


여기


무언이 하나 끼여 있다.




365일 하고도


서른 여덟갑절


무던히 파먹은


至上의 바보여




저마다 잘나고


속여야


이 세상은 산다는데


속이기는커녕


속는 덴


둘째 가라면 서러워




제 털 뽑아


제 구멍에 박는다


한다




간다 간다


그리운 고장


내 집에도 못 돌아가고


한다 한다


무엇을 했느냐는


아내의 핀잔




잊어라도 보고 싶은 빛처럼


주름살만이


어김없이 늘어가는데




낸대 낸다


책 한권 못 내고


제법


시 한 수 변변히 못 쓰며


내 딴엔


線을 하나 그어보겠다는


끔찍한 詩人이여




그래도 무슨 희망이


아침 햇살 모양


틈만 보면 물밀어 오는지


내사 아비요 남편이요


일곱 중엔 독불장군




찢어진 國土, 가파른 고갯길


상처입은 가슴은


다 헤어진 가방에


내일을 싣고


집을 나서는 오늘만이


스스로 다행이랄까


<1957. 9. 『思想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