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메뉴 닫기
 
Community

커뮤니티

"우리들의 60년"

제목
반갑다, 친구야! (77 서진희) (2008.06.28)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반갑다, 친구야!


77 서진희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그야 말로 ‘영문’도 모른 채 입학하고, 벌써 졸업한 지 25년째를 맞아 재상봉 행사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학부시절, 처음 대학 축제를 경험하면서, 기대와 실망이 뒤섞이는 와중에 매우 특이한 집단이 눈에 띄었었다. 축제의 낭만과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 사람들은 이상한 모자를 머리에 쓴 중년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바로 이 그룹의 사람들이 되었다. 77학번! 2006년 재상봉 행사를 하는 학번이다.


대학시절을 회고할 때 축제는 내게 별로 인상에 남는 사건이 아니다. 그나마 일학년 축제가 조금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인데, 그 당시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쌍쌍파티였다. 마지막 날인 금요일과 토요일에 파트너와 함께 하는 이 파티를 위해, 보통 축제용 미팅을 하곤 했다. 연대 축제를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파트너가 구해지긴 한 것 같다. 그러나 금요일을 간신히 파트너와 보내고는 토요일엔 적당한 핑계를 대고 학과 친구들과 같이 지냈다. 파트너가 마음에 안들었다기보다는 부담 없이 친구들과 지내는 것이 훨씬 재미있어서였다. 쌍쌍으로 온 친구들을 짓궂게 따라다니며, 껌과 과자를 몇 배의 값으로 팔아서 저녁에 우리끼리 놀았으니까 말이다.


영문과는 문과대학에서 아니 전체 학교에서 아마도 남녀 비율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았나 싶다. 우리 학번의 경우, 35명 입학정원에 17대 18(어느 쪽이 남학생 또는 여학생 비율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이었다. 따라서 자체 조달로 인해 미팅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축제에서 쌍쌍파티에 영문과 학생들의 참여가 저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 더 엠티를 열심히 갔었는데, 나는 집이 지방인지라 연휴가 생기면 집에 가느라 참석을 많이 하지 못했다. 여학생 중에서 서울이 아닌 지방학생은 나와 김성숙 둘 뿐이었다. 그런데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감행한 지방 순회여행은 학과 친구들과 친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부산과 대전, 강원도 울진을 아우르는 꽤 긴 여행이었다. 부산에는 성숙이 외에도, 강문구, 김대수, 지금은 고인이 된 성원근 등이 살았었다. 대전은 내가 살고 있었고, 울진은 김종국의 집이 있었다.


여행 멤버로는 조혜자, 박영서, 정혜경, 강용순(남), 위인덕이었는데, 먼저 우리 집이 있는 대전을 거쳐서 부산을 갔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의 안내로 대전 근교의 계룡산에 함께 갔는데, 혜자는 여전히 치마를 입고 등반을 한 일이다. 혜자의 치마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져, 아무도 바지를 입은 모습을 본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부산 여행은 나로서는 난생 처음이었던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다. 성숙이의 안내로 유명한 곳을 이곳저곳 구경하고, 문구네 집에서 푸짐한 식사도 했다. 여행의 정점은 마지막으로 간 울진이었다. 울진은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시골이었다. 한여름의 더운 날씨에 냉방이 되지 않는 시외버스를 타고 한참을 비포장도로로 갔던 기억이 난다. 보수적인 시골의 남학생 집에 여학생들이 여럿 몰려가는 일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좀 드문 일이어서, 우리는 집 근처에 다가갈수록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며 들어가는 우리들을 종국이 어머님은 반갑게 맞아주셨고, 새까만 감자떡을 만들어 주셨다. 지금은 웰빙 음식으로 인기가 있음직한 감자떡이 그때는 너무나 신기하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서울행 기차를 타고, 나는 대전역에서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2학기가 되면서 처음으로 연고전을 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응원연습이 훨씬 재미있는 연고전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미 익힌 연대, 고대의 응원가를 편안하게 마스터 하면서 응원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영문과 여학생들은 응원을 매우 열심히 했으며, 중앙 가장 앞자리에 주로 앉았기 때문에, 바로 코앞에서 응원단장과 부단장이 몸이 흠뻑 땀에 젖도록 열심히 응원을 지도하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응원의 열기가 연고전이 끝나고도 계속되었다. 두 여학생이 단장과 부단장을 각각 좋아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열성 팬의 차원에서 시작되었을 것인데, 이것이 발전하여 급기야 기수단으로 활동했던 이혜경, 안기려를 통해 소개팅을 주선하기에 이른 것이다. 연고전에서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가 되었데, 그날 맞선을 위해 새로 준비한 빨간 투피스를 입고 왔던 그 여학생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 여학생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매일 매일 진행상황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온갖 호기심과 상상으로 들떠 있었다. 드디어 소개팅은 이루어졌고, 직접 만나본 응원단장은 그렇게 멋있지도, 남다를 것도 없는 평범한 남학생이라는 현실을 깨닫고는 한갓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다.


2학년이 되면서, 전공과목이 시작되었고, 영문학 개관을 원한광 선생님께서 가르치셨다. 한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잘하시는 분이긴 하지만, 액센트는 있으셨다.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고, 그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영어강의를 우리는 헤매면서 들어야 했다. 어느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봄 날, 때마침 열린 창문을 통해 벌이 한 마리 들어와 강의실을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다 한국말이 다소 서툴던 안기려 쪽으로 날아갔다. 깜짝 놀란 기려, “아니 이게 모야?” 원한광 선생님의 즉각적인 답변, “아마 볼(벌)인가 봐.”로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수업시간에 졸던 학생들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1학년 때 들었던 이봉국 선생님의 강의도 매우 인상적이다. 단편 소설 혹은 수필이었던 것 같은데, 중간고사 시험 문제 중 하나가, 교재에서 묘사된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감수성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해석을 하시다가도 눈물을 흘리시며 강의를 중단하신 적도 있었다. 강의 시간에 눈물을 흘리셨던 또 다른 분은 미국문학을 가르치셨던 조성규 선생님이시다. 마크 트웨인의 어떤 작품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나 실감나게 해석을 하시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셨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젊은 나이의 우리는 오히려 감수성을 많이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에 비해, 매우 이성적인 어학쪽 수업으로 손한 선생님의 언어학 개관이 있었는데, 여유 있게 앉아 강의를 들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공포의 시간으로 선생님과 눈을 맞추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던 시간이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수업에서 시작된 언어학과 인연이 이어져 오늘의 전공을 하게 된 셈이다. 요즘 나는 학생들에게 영어학 개관을 가르치면서, 똑같은 교재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때 초판이었던 An Introduction to Language가 7판이 된 것을 보며, 옛날 생각에 젖을 때가 있다.


4학년 때 영어발달사를 전형국 선생님께 들었는데, The Canterbury Tales의 서문 중 한 단락을 중세영어로 그대로 외워 시험을 보는 것이 있었다. “환 다트 아프릴 위드 히즈 쇼레스 소테(Whan that April with his showres soote)…”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한 사람씩 연구실에 들어가 녹음기 앞에서 외워야 했는데, 얼마나 떨렸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김태성 선생님의 영문법(영작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강의는 화란의 영문법학자 Otto Jespersen의 nexus와 substance(주술관계)에 대한 개념을 매우 강조하셨고, 왜 중요한지도 모른 채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학창 시절 아쉽게도 몇 분의 선생님들이 유명을 달리하셨다. 오화섭 선생님의 셰익스피어 강의를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강의를 의자에 앉아서도 하시곤 했다. 또, 양영재 선생님의 갑작스런 타계는 매우 충격적이었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금의 본관이 문과대학이었던 시절, 타 학과 학생들도 대부분 얼굴이 친숙했다. 정문에서 백양로를 따라 언더우드 동상을 지나 문과대로 오는 길은 하나였고, 대부분의 수업이 이 건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영문학과 사무실은 2층 남향, 양쪽 복도로 교수님들의 연구실이 있었다. 조신권 선생님의 연구실은 특히 책으로 꽉 차 있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이 건물은 석조 건물인데다가, 담쟁이가 덮고 있어서 그런지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냉방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었는데, 창문만 열어놓으면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강의 사이의 빈 시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했던 청송대를 지나 이대 후문에 이르기는 그야말로 산길을 걸으며 노래도 부르고, 수다를 떨던 기억이 난다. 물론 독수리 다방파도 있었다. 독수리 다방은 삐걱거리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2층에 있었는데, 어두운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가운데에도 책을 보고 숙제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늘 영자신문사 일로 바빴던 노혜란, 노래 잘하는 하모니의 이진아, 새침했던 인천 아가씨 김영미, 공부를 잘했던 김윤옥, 독특한 곱슬머리의 키 큰 임순희, 고시공부에 빠져있던 김정숙, 참한 모범생 김인숙, 몸이 약했던 이은지 언니, 애주가가 싫어하는 이름이라고 소개하던 한금주, 금주의 단짝 친구였던 김성애, 조용했던(알고 보면 별로 그렇지 않은) 황정원, 복스런 얼굴의 변국향, 연세춘추와 영어연극 연출에 빠져 있던 김현숙, 매력적인 최경미, 얼짱 현정주. 벌써 중년이 넘었구나, 우리가. 이번에 모두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반갑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