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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잊지 못할 스승님: 조신권 교수님 (79 문상영) (2008.07.22)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잊지 못할 스승님: 조신권 교수님


79 문상영




대학 시절이 마치 유년기처럼 매우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입시교육 때문인지 몰라도 중고등학교 시절은 내 인생의 흑백영화 시기처럼 느껴지는 데 비해 대학 시절의 기억들은 훨씬 편안한 모습으로 그리고 화려한 색깔로 다가온다.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을 다녔어도 자신의 대학 시절에 대한 기억의 내용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기억의 내용에는 어머니의 품처럼 우리를 감싸 안아 준 캠퍼스―우리가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에 상응하는 역사와 사연들을 간직한 강의실, 도서관, 노천극장, 청송대, 체육대회를 가졌던 운동장 등―와 같은 공간이 있을 것이고, 그런 공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 관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현재 모교에 남아 후배들을 가르치는 행운을 누리는 필자에 대해서 영문과 동기생들이나 선후배들은 과연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을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선, 필자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지 간에 필자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경우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의 기억이란 그리 정확하지도 않으며 기억의 주관적 성격을 고려할 때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필자도 지금껏 살아오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 대한 기억을 갖고 살지만 타인에 대해서 이처럼 지면을 통해서 서술하는 것은 가급적 사양하고 싶다. 더욱이, 그 서술 대상이 필자의 은사이시라면 이런 어려운 역할을 가능한 한 다른 능력 있는 분에게 부탁할 것이다. 독자들도 이런 심정을 감안해 혹시라도 필자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분들에게 누를 끼치는 부분이 있다면 관용을 베풀고 필자의 불완전한 기억을 탓해주기를 부탁드린다.


필자의 동기들(1979년 입학)은 계열로 입학해서 1학년 때에는 전공이 정해지지 않았고 2학년에 진급할 때 영문과로 ‘진입’이 결정되었다. 영문과 2학년으로 진급해 영문과 선배님들의 과분한, 그리고 뜨거운 진입식 환영회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특히, 냉면사발에 술을 가득 부어 마실 것을 권하던―아마 강요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선배님들의 모습은 그날 행사의 압권으로 기억되곤 한다. 음주에 관한한 어느 정도 단련이 된 지금의 입장에서 그 날 필자의 모습을 돌아보면 지금도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된다. 늘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기독교 동아리에 가입해 ‘차분’하게 지내던 필자가 그날 선배님들 앞에서 난감해하던 기억과는 달리 신입생 때부터 이미 이와 유사한 음주 문화를 체험한 다른 동기생들에게 그날의 체험은 별다른 충격 없는 그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선배들과는 달리 우리 동기들은 정원이 70명이나 되었으므로 모두 가족과 같은 분위기로 친해지기는 어려웠다. 일학년 때 같은 반에서 영문과로 진입했거나 같은 동아리에 속한 영문과 동기들은 비교적 잘 알고 지냈지만, 다른 동기들과는 그다지 추억을 공유할 시간을 갖지 못한 점이 매우 유감으로 생각된다. 건강에 문제가 있어 2학년을 마치고 1년 동안 휴학을 하게 된 사정도 더욱 아쉬운 점이다.


1979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었고, 이듬해에는 전두환 군부 독재체제가 들어섰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충만했어야 할 대학교 1, 2학년 시절 우리는 학업보다는 독재 정치에 신음하는 사회 현실을 더욱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최루탄으로 인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우왕좌왕하던 우리의 학창시절과 현재의 발랄한 후배 대학생들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지만, 지금의 대학생들 처지가 그 시절의 우리들보다 그리 나아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강해지면 나이가 드는 징조라고 하지만, 80년의 봄에 데모 출정식을 가지며 동기들과 굳게 어깨동무를 했던 그 시절이 웬일인지 그립다. 안타깝게도 그때 어깨동무를 같이 했던 사람들 중에는 그 후유증으로 지금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


어수선한 시국으로 인해 전공 공부에 대한 관심은 복학을 한 3학년 이후에나 갖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한 강제 휴교 조치로 2학년 때 몇몇 동기들과 언어학 스터디 그룹을 조직해 한동안 공부를 계속한 시기가 있었다. 복학하고 나서는 우연히 조신권 교수님의 영시 읽기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모임에서 동기생들뿐만 아니라 대학원 선배들도 알게 되었다. 영시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던 그 시절 주옥 같은 영미 대표 시인들의 시를 원문으로 접하며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웠던 소중한 기억은 필자가 현재 영문과 교수가 되어 후학을 지도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1984년 무렵 겨울이었던 것 같다. 연세대에 교환 교수로 나오셨던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김진우 교수님으로 인해 이 영시 모임이 방해를 받은 적이 있다. 그날 우리는 읽어야 할 시들을 절반도 끝내지 못한 상태였는데, 조신권 교수님과 영문과 동기생이셨던 김진우 교수님은 ‘눈치 없이’ 막무가내로 계속 문을 두드리며 “뭐 해, 빨리 끝내지 않고!”라고 재촉하시는 바람에 결국 조신권 선생님께서 항복하시고 학생들과 함께 모두 학교 앞의 카페로 향하게 되었다. 때마침 하늘에서는 캠퍼스를 뒤덮을 기세로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해 사람들은 모두 어린아이들처럼 “눈이다”라고 환성을 질렀다. 당시 두 분 선생님들이 함께 계신 모습은 학생들의 미소를 연실 자아냈는데, 다소 어눌하시고 굵은 바리톤 음성으로 말하시는 조신권 선생님과는 달리 김진우 선생님의 위트에 넘치는 그리고 때로는 경박한 느낌까지 주는 어투는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대학원 진학에 대한 결정은 쉽지가 않았다. 언어학 스터디 그룹이건 영시 읽기 모임이건 그저 공부하자는 목적이었었지―당시는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느낌을 더 좋아했었던 것 같다―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4학년에 접어들어 취업이나 대학원 응시를 결정해야 할 즈음 어느 날 영시 모임에서 조신권 교수님은 “상영이, 대학원에 올 거지?”라는 말씀을 하셨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의 이 한 마디는 진로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던 필자의 마음에 계시와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을 고려할 때 필자는 당연히 취직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조신권 교수님의 격려를 받은 이후 마음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이러한 마음을 헤아린 것일까, 어머님과 누님들은 하고 싶은 공부를 좀 더 하라며 오히려 필자를 격려해주었다. 고민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조신권 교수님과 김성균 교수님은 경제적으로 역시 매우 어려우셨던 선생님들의 개인적 체험을 들려주시며 어려움을 극복할 의지와 영문학 공부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어주셨다. 대학원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손한 교수님께 누를 끼친 점이 지금도 마음이 걸린다. 2학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동기 김유상과 함께 언어학 스터디 그룹을 조직해 공부하면서 언어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고, 어학 교수님들과 면담을 한 적도 있었기에 손한 교수님은 필자가 당연히 대학원에서 어학을 전공할 것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오해는 대학원 시험을 치르기 전에 손한 선생님을 찾아뵙고 영문학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졌음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하지 못한 필자의 불찰 때문이다. 당시에는 손한 선생님의 꾸중을 듣고 마음의 결정이 흔들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학과장을 맡으신 조신권 교수님의 조교로 2년 동안 일하게 되어 선생님과의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학과장 선생님의 조교로 선택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영광이기도 했지만 저녁시간을 제외하고는 낮에는 책을 볼 수 없는 상황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심각한 불만이 생겨 정신적으로 방황하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헤아리신 선생님은 저녁을 사주시며 애로사항에 대해 위로해주셨다. 돌이켜보니, 당시 필자로서는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지만, 연세대 영문과 차원에서 보자면 월례 학술발표회가 시작되는 등 영문과 모임들이 매우 빈번하고 활기찼던 시기였던 것 같아서 흐뭇한 기억으로 다가온다. 당시에는 대학원생 합동 연구실이 따로 없었고 많은 대학원생들이 교수님들의 연구실에 있었는데, 이런 사정 때문에 많은 에피소드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선생님들께서는 오후가 되면 연구실을 비워주시기 위해서 일찍 퇴근들을 하시는 것 같았다. 따라서, 저녁 시간에는 조교들이 연구실의 주인처럼 행동한 측면들이 많이 있었다. 저녁 시간에 연구실에서 필자를 포함해 조교들이 차분히 공부에 매진하지 않고 모여서 환담을 나누는 등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즐겁지만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에피소드도 있다. 여름날 저녁 언제인가 연구실에 1년 후배 김용태 군이 갑자기 나타나 “상영이 형, 나 여기 왔었다고 말하면 안 돼!”라고 말하며 누군가의 신발 한 켤레를 숨겨달라고 한 뒤 정신없이 내빼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같은 층에 있는 나건석 교수님 연구실 조교인 78학번 이태성 선배가 와서 “혹시 누구 왔다가지 않았냐?”라고 물었고, 나는 김용태 군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바 있어 그런 일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명지대학교 영문과 교수이며 지금은 미국으로 안식년을 갔다는 소식이 들리는 김용태 후배는 과거에 2년 선배를 놀리고, 1년 선배를 공범으로 만든 “죄”를 뉘우쳐 귀국하면 꼭 사죄의 술을 사길 바란다). 영문학과장 조교로서 필자는 조신권 교수님을 찾으시는 영문과 교수님들을 뵙는 기회가 많아서 알게 모르게 선생님들의 관심을 더 받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사정으로, 당시 수강하는 과목들 외에 청강하는 과목들까지 한 학기에 5과목을 수강한 학기들도 있었다. 많은 과목을 듣다보니 수업준비를 충실히 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더 많은 과목을 듣고 그만큼 영문학 전반에 대한 견문을 넓힌 듯하다. 당시 대학원생들은 박사과정 학생들을 제외하면 학번 차이가 크지를 않아서 모두들 거리가 없이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매년 여름이면 하루 날을 잡아 교수님들과 함께 전체 대학원생들이 북한산으로 등산을 가곤 했다. 당시에는 산에서 취사와 음주가 가능했기 때문에 요즘처럼 순수한 의미의 등산이 아니라 북한산 등산을 겸한 일종의 영문과 단합대회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학과장이셨던 조신권 교수님은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맥주를 따라주시고, 주량이 센 사람들은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었던 일종의 영문과 잔치가 되었다. 우리는 북한산 계곡에서도 바로 옆에 시냇물이 흐르고 비교적 펑퍼짐한 바위들이 있어 몇 백 년 전이라면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을 장소를 찾곤 했다. 이런 근사한 장소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다보면 불현듯 흐르는 물처럼 우리는 잠시 왔다 가지만 북한산과 같은 자연은 변함없이 남아 새로운 사람들을 맞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가기도 했다. 봄날의 햇빛처럼 온화한 추억들이 있다면, 그 반대로 흐린 날, 혹은 어둠의 그림자가 있기 마련인가? 대학원 시절 양영재 교수님께서 간암 진단을 받으신 지 불과 몇 달 만에 타계하시는 비극이 영문과에 찾아왔다. 40대 후반, 지금의 필자 나이에 불과한 양 교수님이 쓰러지신 것이다. 선생님의 인자한 모습과 학생들에 대한 따뜻한 격려의 말씀은 지금까지도 필자로 하여금 학생들 앞에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되돌아보게 한다.


대학원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필자는 77학번 강용순 선배님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때도 필자는 예고 없이 불쑥 조신권 교수님을 찾아뵙고 주례를 부탁드렸다. 제자와 대학원 조교로서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던 필자에게 조신권 교수님은 흔쾌히 결혼식 주례를 봐주심으로써 또 한 번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조신권 선생님께서는 필자가 시간 강사를 하던 시절 어머니가 세브란스에서 위급한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셨다. 아마도 필자가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 짧은 지면에서 모두 열거하기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조신권 선생님을 비롯한 영문과 선생님들께서는 비록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여전히 여러 면에서 부족한 필자를 믿고 영문과 전임 교수로 채용해주셨다.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필자와 비슷한 연령의 교수들이 영문과의 주축이 되었다. 조신권 선생님께서도 몇 년 전에 정년을 맞으셨고, 이제는 유감스럽게도 자주 뵙지 못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하셨지만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늘 학자로서의 귀감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시다. 선생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필자도 본받고 싶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급변하는 세태이지만, 필자도 조신권 선생님처럼 수많은 제자들의 마음에 기억되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