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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잘 다치던 시절, 그리운 나의 장미 정원 (90 이소연) (2009.01.10)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잘 다치던 시절, 그리운 나의 장미 정원


90 이소연




막 커가는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일까, 과거보다는 살아갈 앞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아니면 삼십대라는 아직은 만만한 젊음의 긴장감이 나를 앞으로 밀어내고 있기 때문일까. 모교에 몸담고 있던 이십대를 생각하면 벌써 눈앞이 흐려지면서 기억을 더듬게 된다. 견딜 수 없는 젊음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면 잊고 싶어서 잊고 살았던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까, 둘 다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장미 정원, 나의 아름다운 모교.


그러나 잘 다듬어진 학교 정원 속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꽃은 장미가 아니었다. 봄 내내 번갈아 피고 지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꽃은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벚꽃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모교를 회상하며 단번에 ‘장미 정원’을 떠올리는 것일까.


빼어나게 아름다운 책 노턴앤솔러지를 곁에 끼고 다니며 오르내리던 문과대의 계단, 그 곳에는 사시사철 각양각색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정말 그랬던가? 지금 내 기억엔 그랬던 것 같다. 그곳에서 온갖 보이지 않는 사치를 다 누리며 살았던 칠 년간의 학창시절은 정녕 축복이었다. 셰익스피어, 베케트, 브레히트, 엘리엇, 이름만 열거해도 가슴과 머리에 아련한 통증이 이는 거장들의 향기를 밥 대신 먹던 시절, 그때의 배부름과 빈곤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를 숙성시켜 정제된 언어로 정리하기에는 십여 년이라는 시간조차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의 그 통증을 아직도 내 가슴이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 대학에 입학하던 신입생 시절, 칙칙한 참고서에 파묻혀 있다가 꽃같이 예쁜 표지의 원서들을 들고 다니는 선배들을 보면서 아, 나도 학년이 올라가면 저런 전공 서적을 들고 다니겠구나, 이런 공부만 하다가 죽어도 좋아, 라고 생각했었다. 더구나 함께 공부하는 동기들, 선배들은 왜 이렇게 멋지고 예뻐 보이던지. 영리하다는 칭찬 많이 듣고 자랐을 학우들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젊음의 열기가 캠퍼스에 만개한 꽃들의 아름다움을 압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 해엔 도무지 꽃이 언제 졌는지도 모르고 지나쳤으리라. 우리에게 우아한 발음으로 영시를 읽어주시는 교수님들의 백발마저 흰 꽃 같다고 생각했고 먼 나라의 예술과 문화를 전해주는 사도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나간 추억 속에 있는 것들이라 다 아름답게 채색되는 것일까? 그러나 다음은 그 꽃밭에서 철모르고 뛰놀다 얻은 상처에 대해 말할 차례다. 어느 해부턴가 내 눈은 캠퍼스에 눈물을 떨구듯 지는 꽃잎을 더 오래 쳐다보곤 했으니까 말이다.


시와 세련된 언어, 서구의 아카데미에서 갓 들어온 신선한 이론과 논쟁에 매혹된 나머지 나는 아이처럼 뛰놀았다. 그러나 아이는 놀이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자기 몸 여기저기 난 상처들을 발견한다. 장미 정원에서 너무 많이 놀았구나. 더구나 그때는 어려서 잘 다치는 시절이었다. 나는 왜 그때 베케트가 한 번도 무대에 등장시키지 않았던 인물인 고도를 헛되게 기다리며 어릿광대들과 함께 울었던 것일까, 왜 까마득한 비극 시인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들이 저지른 끔찍한 사건에 함께 몸을 떨고 소리쳤던 것일까, 4월의 봄비를 맞으며 몸을 떠는 구근의 한숨을 마셨던 것일까? 나에게 꽃잎의 아름다움과 가시의 아픔을 함께 느끼게 해 준 모교, 그렇게 놀 수 있었던 곳은 거기뿐이었다. 앞으로도 어디서도 그만큼의 지적 자유는 물론 자해의 기쁨마저 맛볼 기회는 없으리라. 평생 놀 것을 그때 다 놀고 평생 아플 병을 반쯤은 미리 앓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졸업을 앞두고 취업과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쯤 나는 첫사랑의 아픔을 너무도 해롭게 앓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문과대 대선배인 기형도의 시 구절처럼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무조건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꼭 중간에 잘려나간 듯 허둥지둥 공부를 접고 사회로 밀려나가기 싫었다. 이 재미있는 영문학을 여기서 하다 말고 나가면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학, 특히 우리 토양에 불완전하게 뿌리 박은 외래학문인 ‘영문학’을 대책 없이 물고 늘어지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용기 있는 선택이었던 같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삼 년이란 기간 동안 더 영문학을 파고들어서 내 지적 욕구가 후련하게 달래졌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게 된다고 했던가, 아이는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장미 정원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장미 정원을 떠나서 온몸의 상처가 아물고 과거의 순수한 유희 본능을 잃어버릴 만큼 성장하고 나서도 예전의 놀이터를 잊지 못한다. 아이의 꿈은 과거의 이상향을 달린다. 그것이 추억에 의해 미화되고 채색된 것일지라도.


왜 나는 그토록 그립고 아름다운 모교에서 ‘상처 받았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일까? 예전에 그렇게도 심각하게 읽었던 작품에 빗대어 말하자면 위대한 탐구자 ‘오이디푸스’의 눈을 찌른 브로치의 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아침 세수로 갓 씻고 나온 듯한 어리숙한 내게 모교의 캠퍼스는 주옥 같은 텍스트와 학우들, 스승들과 만나는 조우의 공간이자 인생과 시간, 존재와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해나가는 긴 도정이었다. 내 자신에게 느슨해지고 삶에서의 치열함을 잊어버릴 때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이, 내가 배우는 학문이 뭔데, 학교에서 매일 배우고 토론하는 게 뭔데, 인간이 뭔가? 진실이란 뭔가? 시간은 무엇이며 보이는 것이 참인가? 내가 겨우 이렇게 살려고 그런 거창한 걸 쓸데없이 배웠느냐는 말이다”. 그리하여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찌를 때 나도 아팠다. 그 후 자연스럽게 17세기 믿음의 시인들을 만나고 엘리엇이 「황무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천둥처럼 내지르는 가르침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뭐든지 과정이 있는 법, 나 역시 부활의 신을 만나기 전에 상처 받고 목매달려 수장된 한 인간의 모습을 거쳐가야 했다.


젊다 못해 미숙한 내가 해결하기에 그 모든 물음들은 지나치게 버거웠고 가난한 학생의 생활은 팍팍했으며 그래서 구원이니 초월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 겨우 얻어낸 해답도 먼지에 쌓인 초라한 몰골에 지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때 얻어진 삭막한 세계관을 밑천 삼아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한 줌 재로 남은 세계에서 어릿광대짓으로 시간을 보내는 인간의 헛된 기다림, 그 모습에서 진한 동질감을 느낀 탓이었을까, 내 지적 편력의 중간 정착지를 베케트라는 거석에 틀기로 한 것이다. 그 논문을 얼마나 고생하면서 썼는지, 아무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해 꿀물을 담은 통을 들고 다녔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한 쪽 다리가 마비되어 질질 끌릴 정도로 스스로를 소모시켰다. 영문학 하다가 젊어서 병 얻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그 이후로 아이 낳고 팔구 년을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면 그때 무슨 신이 들렸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자랑스러운 논문이 남아서 힘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하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논문 지도 교수님이셨던 임철규 교수님께는 너무나 큰 신세를 졌는데 변변히 인사조차 드리지 못해 마음 깊이 큰 빚으로 남아 있다.


그때 함께 대학원에 진학하여 고생했던 동기들 모두 쟁쟁한 재사들이었다. 우리 영문과는 유난히 공부량이 많고 알게 모르게 학생들을 혹사시키던 전통(?)이 있었다. 대학원 졸업시험 때 중앙도서관(그때는 대학원생용 도서실이 중앙도서관 5층에 있었다. 비교적 깨끗한 분위기여서 학부생들도 그곳을 애용했었다)에서 공부하다 보면 각종 고시생, 의사시험을 준비하는 의대생들과 함께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 학생들도 ‘저 학생은 매일 밤 늦게까지 무슨 고시를 준비하나’ 궁금해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들고 다니던 책은 전화번호부만한 졸업시험 족보였으니(그게 대여섯 권이었던가). 그 시절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 중 상당 수가 유학을 가거나 대학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던 것으로 안다. 사실 이런 글을 써야 할 사람은 정작 중간에 바람처럼 도망쳐버린 내가 아니라 그 친구들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쑥스러움이 든다. 가끔 신예 평론가들이나 학자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 그 중에 친구들의 이름은 없나 가슴 두근거리며 찾아보기도 한다. 나도 계속 했으면 하는 미련에 대한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지난 시간이 그립다고 해서 마냥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학 때문에 아팠고, 공부 때문에 힘들었고, 풋사랑 때문에 울었던 시절, 철없이 돌아다니다가 여기저기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고 천방지축 실수투성이였기에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도 많다. 그러나 그 시절의 웃음과 눈물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내가 존재하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데,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혈기왕성하던 시절 칠 년이란 세월 동안 나를 품어주고 키워준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는 오늘날의 나에게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 첫 손가락에 꼽고 싶은 것은 인생에서 ‘성스러운 낭비’를 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셈으로 칠 수도 없고 그럴 듯한 보상을 따지기도 어렵지만, 뭔가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더듬고 굴렀던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가 몸 담고 있던 그 당시의 캠퍼스에는 그런 낭비와 모험을 눈감아주고 보듬어주는 분위기가 살아 있었다. 옷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꽃을 따며 노는 어린애를 지그시 지켜봐 주는 어머니의 인내심, 그 자비로운 공간에서 내 영혼은 자유와 지성의 영양분을 흠뻑 들이마실 수 있었다.


지금 대학 캠퍼스는 그때보다 삭막할까? 요즘 매스컴을 보면 심심치 않게 대학이 ‘취업전쟁터’이니, ‘고시학원’으로 변질되었다는 말이 들린다. 그러나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기는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캠퍼스는 젊음의 낭만과 오기가 살아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리숙한 젊은이들의 ‘헛발질 한 방’을 받아줄 수 있는 넉넉한 놀이터를 가질 수 있었던 나는 벌써 구세대의 행운아가 되어 버린 것일까. 이번 봄이 되어 진달래와 철쭉이 캠퍼스를 붉게 물들이는 계절이 되면 한 번 아이의 손을 붙들고 학교를 방문해야겠다. “너도 공부 열심히 해서 엄마 후배가 되렴.”하는 욕심스런 당부도 잊지 않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