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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트렁크와 최루탄, 그리고 영어학 (91 최보성) (2009.02.27)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트렁크와 최루탄, 그리고 영어학


91 최보성




Episode 1.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친 시점이었던 것 같다. 여름에 바다에서 놀지 못한 것이 한이 된 청춘 7명이 모여서 금요일 저녁 속초로 향했다. 다들 돈 없던 시절이라 최소한의 회비를 거두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1인당 약 3만 원 안팎이었던 것 같다. 일단 출발해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로 인해 영원히 잊지 못할 악몽(이라기보다는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버스터미널에서 속초행 버스를 타고 갈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여행지에서의 숱한 낭만적인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가슴은 사뭇 부풀어 올랐다. 고통의 순간은 속초터미널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예약한 콘도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되었는데 예산절감을 위해 택시기사분과 협의를 하고 미터기 가격에 약간의 프리미엄을 얹어주는 조건으로 6명 모두가 택시(소형이었음) 1대에 탔다. 구겨진 종이처럼 겨우 타서 가고 있는데, 기사분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하시는 말씀이, 저 앞에 검문소가 있는데 검문소에서는 규정인원 이상 태우고 운행하면 걸린다고 2명은 트렁크에 타라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으나 예산절감이라는 절대적 목표 앞에서 기꺼이 2명을 뽑았다. 나와 다른 아담한 체구의 친구가 같이 소형택시의 트렁크에 탔다. 그렇게 약 200미터 정도 운행했던 것 같다. 그때의 고통이란!!! 한석규, 이은주 주연의 <주홍글씨>라는 영화를 보면, 두 주인공이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고통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참으로 깊은 감정이입을 했던 것은 왜일까?


그날 저녁 해변 백사장에서 유성을 보았다. 누군가가 유성을 보면 소원을 비는 것이 낭만적이라는 말을 했고, 우린 모두 낭만적인 추억을 만들어야 된다는 신념으로 소원을 빌었다. 소원의 내용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우리는 굶지 않고 그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기원했어야 했던 것 같다. 2박 3일 동안 1끼 밥 먹고 3끼 라면 먹고 나머지는 아이스크림 하나와 초코파이 하나로 때웠으니 말이다.




Episode 2.


1991년 봄부터 여름까지는 가히 분신(焚身)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버린 시절이었다. 집회도중 발생한 사고로 인해 여러 젊은이들이 죽었고, 자의로 분신한 청년들도 여러 명 있었다. 매달 1명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목숨이 사라져간 시기였다.


91년 6월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종로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한창 구호를 외치고 집회를 하다가 대로의 양쪽으로 전경들에게 포위되었다. 최루탄이 쏟아져서 시야 확보마저 쉽지 않은 자욱한 종로거리에서 집회에 참여했던 인원들은 주변 골목길들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워낙 많은 인원(수만 명으로 기억)이 참여 했던 터라 골목길들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콩나물 같은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의 고통은 참으로 대단했다. 최루탄으로 인해 숨쉬기도 쉽지 않을 만큼 괴로웠기에, 누군가가 만약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그 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즈음 그런 상황에서 타 대학 학우 한 사람이 넘어져서 사망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 고통의 순간, 무심결에 주위를 돌아보다가 노인 한 분이 고개를 숙인 채 종로대로를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모든 젊은이들이 골목길로 빠져나가고자 북새통을 이룬 때, 그 노인은 최루탄이 난무하는 종로거리를 그냥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을 뒤흔든 감정을 아직도 정의할 수가 없다. 내 눈에는 더 이상 최루탄도, 물대포도, 아우성치는 젊은이들도 보이지 않았고 알지 못할 서러움이 폭발하여 가슴은 감정의 과잉이 홍수가 되어 흘러넘치고 있었다.


마스크와 모자, 손수건 등으로 무장을 하고도 서로 밀치며 골목길로 빠져나가던(결국 넘어져 죽은 한 젊은이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진 못한), 젊은이들에 비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그냥 묵묵히 대로를 걸어가던 모습이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준 것일까? 아니면 군사정권과 학생시위, 전략과 투쟁, 최루탄과 물대포, 그에 맞선 짱돌… 이 모든 것과 너무나 이질적인 그 모습에 우연히도 예술적 감동의 순간에 직면한 것인지… 지금도 궁금할 따름이다.




Episode 3.


재수를 하던 시절, 학과선택의 기준은 소거법이었다. 싫은 과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다 보니, 남은 것들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흐리멍덩하게 학과 선택을 하다 보니, 공부도 등한시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입학하던 때는 3저(유가, 금리, 달러) 호황의 낙관론이 아직도 위력을 발휘하던 때라, 모두들 그런 호황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다. 흔히들, “정 안되면 대기업이라도 가지 뭐.”라는 말들을 하고 학점이 안 좋은 선배들도 최소한(?) 대기업에는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취직을 안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조직생활을 싫어하는 개인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고, 원하기만 하면 대기업 취직은 언제든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여유롭게(?) 1, 2학년을 보내고 입대를 하고 또 제대를 했다. 근 5년간을 공부와는 담쌓고 살다가 다시 시작하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당시 영문과에서 열심히 공부하느냐 아니냐의 기준은 영어학과 Writing으로 구분했다. 전공필수인데다가 리포트 및 공부 분량이 많은 편이라, 두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친구들은 우등생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었다. 영어학은 2학년 전공필수였지만, 나는 여러 사정상 제대 후에 수강을 하게 되었고 영어학과 Writing을 한꺼번에 수강했는데, 무진장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여간내기가 아닌 후배들과의 어쩔 수 없는 실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더 많은 시간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당시 후배들이 2시간 만에 쓰던 리포트를 7∼8시간 걸려서 하곤 했다. 정성이 갸륵해서인지 두 과목 다 좋은 점수를 받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내가 과 동기들을 만나면 뽐낼 수 있는 대단한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