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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Unidentified Caller ID (92 안지원) (2009.02.27)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Unidentified Caller ID


92 안지원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방학의 첫날 아침! 괜한 흥분에 일찍 일어나서 서울에 계신 엄마와 모처럼의 긴 통화를 하고, 고양이 먹이도 주고, 늦게 일어난 남편이 불 피워 놓은 난로 앞에 커피랑 잡지를 들고 앉았을 때, 전화가 왔다. Caller ID를 보니 틀림없는 서울 전화번호. 서울이라면 지금 새벽 한 시도 넘었을 텐데… 전화의 주인공은 연대 최종철 교수님. 영문과 60주년 기념 원고 이야기를 하신 것 같은데, 너무 갑작스러운 전화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10년 만에 듣는 이 목소리는 깜짝 놀랄 만큼 내 기억 그대로이다. 듣고 있는 나는, 10년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미국의 낯선 고장에서, 어쩌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예전의 계획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게다가 전화를 받고 내가 더 놀란 이유는 최근 들어 최종철 교수님 생각을 몇 번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영문학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만큼 교수님들과 각별하게 지낸 일도 없었지만, 그래도 추천장이며 여러 가지 유학 준비를 정성껏 도와주신 최 교수님께 졸업과 동시에 작별인사를 드렸을 때, 무슨 TV 드라마에 나오는 ‘운명철학가’처럼 교수님께서 하신 한 말씀. “뭐든 한 가지 일을, 아무 생각 말고 십 년만 꾸준히 해봐라. 십 년이 지났을 때 너는 뭐라도 되어 있을 테니까.” 미국에 와서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시작하고, 여러 학교와 학위, 직장들을 옮겨 다니면서, 이렇게 추상적인 학문(미디어 비평이론)을 하면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으로 밤잠을 설칠 때마다, 10년은커녕 당장이라도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그래봤자 뭐 별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그동안 들여온 시간, 노력, 학비가 아깝기도 하고, 뭔가를 또 확 바꿔 보기엔 게으른 성격 탓도 있고, 무엇보다 처음엔 의욕을 가지고 달려든 길이기에, 하루하루 하던 일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십 년이 흘렀다. 지금의 내가 교수님 말씀처럼 ‘뭐라도’ 되어 있는 거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요사이 여러 번 혼자 생각해 봤다, 막히는 고속도로 차 안 에서, 혹은 설거지를 하다가 창밖을 내다보면서.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제 더 이상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몰라서 고민하고 잠을 못 이루는 일은 없다는 것.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하길 원해왔던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은 일이라는 작지만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는 것. 이 일을 계속 함으로써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또 이룰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가령, 큰돈을 만지게 된다거나 노벨상을 탄다든지 하는 것), 비교적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 여전히 추상적으로 보일지라도, 내가 공부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영화이론의 담론으로서의 가치, 나아가 인문학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 나는 이제 쭈뼛거리지 않고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와 대중매체를 직업으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그리고 그 공부를 남들에게 전하는 선생으로서,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얻게 될 즐거움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언제부터 이런 확신들을 갖게 된 것인지는 정말 모르겠다. 불과 최근 2∼3년 사이(?) 마치 산신령이 나타나서 내 질문들에 답해 준 것처럼 이제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겼다. 아마 교수님께서 예언하신 십 년의 Deus ex machina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에 답답해하면서도, 모른다고 너무 창피해 하지 않고, 미치거나 그만두지도 않고, 버티면서 단단해진 나 자신의 근성이었나?(그런가요, 교수님?)


그렇게 내 20대의 십 년도 나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연세 영문과는 60년을 한자리에서 버텨 왔단다. 사실 영문과가 언제 생겼는지도 오늘 듣고 알았다. 내가 연세대 영문과에 가게 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적인 선택이나 피나는 노력의 결과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지루하기만 하던 고등학교 시절, 수업 빠지고 보러 다니며 부쩍 좋아하게 된 영화. 언젠가 영화와 관련된 일이나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대학 전공과목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의 몇 개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있긴 했지만 내가 공부하고 싶은 이론 쪽으로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는지 확실치 않을 뿐 아니라 아무래도 부모님께 너무 큰 충격을 드릴 것 같았다. 당시의 ‘연영과’란 연예인 지망생들의 학과라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강했으니까. 어차피 대학 공부에 큰 기대가 없는 이상 문과대학 어떤 학과라도 상관없다는 나와, 고3 담임선생님(수학담당), 엄마, 그리고 내 모의고사 평균 점수 사이에서 무슨 수학 공식 풀 듯 연대 영문과라는 결론이 나왔던 것 같다. 다행이 합격도 했고, 학교가 잠실 우리 집에서 좀 멀긴 했지만 대학입시라는 관문을 비교적 무난히 통과했다는 안도감으로 첫 등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무리 큰 기대가 없다고 해도 영문과에서의 시작은 실망뿐이었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걸어 다니기엔 정문에서 너무 멀기만 한 인문관, 118명의 압도적인 학생 수,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다 보니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시들해 보이는 학과목과 강의내용,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도 똑똑한 동기생들! 당시만 해도 암기위주의 고등학교 공부를 무조건 외우는 식으로 안일하게 했던 나는 ‘1등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물든, 아니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런 듯한, 수 십 명의 똘똘한 여학생들이 모인 과 모임들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어디에 가든 공부도 1등, 외모도 첫 번째, 집안도 부자, 한마디를 물어보면 세 마디 이상으로(종종 영어도 섞어서) 답하는 당차고 자신만만한 동기생들. 듣자하니 영문과 여학생들은 드세고 콧대 높기로 잘 알려져 있다고 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반항이라도 하듯 재빨리 동아리―계획대로 영화써클―에 가입했다. 영화패는 내가 상상한 바와 꼭 같이 술 담배에 절어 살고, 잘 안 씻고, 여러 가지 고민과 불만이 많은 남자 선배들이 가득한, 영문과와는 정반대의 집단이었다. 학과수업보다는 써클 방으로 등교하는 날이 더 많다 보니, 첫 학기 학점이 2.50이었던가, 아무튼 영화패 최고의 학점이라고 선배들이 농담하며 박수 쳐 준 기억도 난다. 그래도 시험 날은 빼먹지 않고 출석하면 성의껏 쓴 답을 보여주던 내 앞 번호의 동순이, 지금 잘 지내고 있는지…


그렇게 한두 해를 보내고,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많은 학과친구들이 교환학생으로 떠난 3학년쯤 되었을 때 아무래도 영화공부를 더 진지하게, 유학도 가고 학위도 하면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료도 찾아보고(인터넷이 지금처럼 상용화되기 이전) 책도 읽으면서 점차 알게 된 것은 영문학 공부가 영화학과 전혀 동떨어지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학이든 영화든 동시대의 예술 매체들이 서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된다는 건 얼핏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두 분야의 학문적 담론들 또한 비슷한 계보의 서구 비평이론가나 사상가들의 글과 상호 작용하고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는 사실은, 숱한 전공 및 교양수업을 빼먹은 나로선 알 수 없었던 일이다(당시는 한창 인문학은 물론 사회과학 전반까지 interdisciplinarity가 논의되기 시작하던 90년대 중반이다). 대학원 과정으로 유학 가기 위해선 전공에 상관없이 우수한 학부 학점이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결국 당차고, 잘 아는 것도 없이 남을 쉽게 판단하고 콧대 높게 행동한 건 나였다, 라는 부끄러운 깨달음을 통해 탕자처럼 뒤늦게 돌아오게 된 영문학 공부는 오늘까지도 나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임철규 교수님과 강독한 현대 희극 작품들, 최종철 교수님과 번역한 Joseph Campbell의 The Power of Myth, 또 감동으로 밤새워 읽었던 Shakespeare(계속 만들어지는 영화 version들로도 보게 되지만), 김태성 교수님과 강독한 post/modern parody의 근간 Pamela와 Shamela, 원한광 교수님과 읽은 Hardy와 Dickens 작품들(Dickens의 문체는 미국의 초기 영화감독 D. W. Griffith의 cinematography의 원형이라고 논의된 바 있다). 모두 나에게 부족한 인문소양을 제공함은 물론 영화학습만으로는 터득하기 힘들었던 비평적 사고의 근간(in a literary sense)을 마련해 준 것 같다.


내가 현재 재직 중인 작은 주립학교가 있는 New Hampshire주는 New England의 다섯 개 주들 가운데서는 여러모로 비교적 미약한 편에 속하지만―경제력에서는 Massachusettes나 Connecticut에 뒤지고 자연경관 면에서는 이웃 Vermont이나 Maine만큼 기막히지 못하다는 평―그래도 몇 가지 잘 알려진 상징을 가지고 있다. 북미 최다(?)라고도 하는 수많은 호수들, 가을 단풍과 B&B 위주의 관광 산업, 우리에겐 일제 강점의 시작으로 기억되는 포츠머스 조약의 미항 Portsmouth, 그리고 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 비록 만 이 천년을 버텨오던 암벽이 중력의 힘으로 2년 전 갑자기 무너져 내린 후 Hawthorne에게 영감을 준 완벽하던 얼굴 형상은 영원히 사라졌지만 the Old Man of the Mountain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여전히 New Hampshire 주의 아이콘으로 쓰여지고 있다. 하루에도 수 차례씩, 자동차 번호판 배경의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청소년기의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종종 떠올린다. 큰 부자나 유명한 장군, 출세가도의 정치가, 그리고 재능 있는 시인도 아닌, 가진 것 없고 평범하지만 겸손하고 지혜로운 노인이 이루게 된 큰 바위 얼굴의 전설. 지혜로운 아줌마나 할머니가 이루게 된다면 나한테는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그리고 누군가 한 명이 ‘최후의 승자’라는 식의 결말이 좀 꺼림직 하긴 해도 19세기 중반을 살아간 Hawthorne의 이 이야기는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내 생각에 결국 이야기의 교훈은, 보수적으로 단순히 ‘소박한 일상에 만족하며 충실히 하루하루 살다 보면 평범한 당신도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somehow’가 아니라, ‘눈부신 출세와 부귀영화의 길이 여기저기에서 유혹하는 오늘날, 자신의 중심을 지키며 스스로의 도덕률을 세우는 것은 초인의 경지에 다다를 만큼 어려운 일이다’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연세 영문과를 떠난 지 올해로 십 년, 각자의 분야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함으로, 때로는 소박하고 때로는 놀라울 만큼 눈부신 성공을 거둬온 자랑스런 92학번 동기들, 우리 모두 앞으로의 십 년은 (그리고 그 이후는) 또 어떤 열정으로 매일 살아갈지, 영문과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