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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2/11/23 [한겨레] 프락치 강요…“창문 없는 방, 2주 갇혀 친구 이름을 적었다” [인터뷰]
작성일
2022.11.23
작성자
공익법률지원센터
게시글 내용

프락치 강요…“창문 없는 방, 2주 갇혀 친구 이름을 적었다” [인터뷰]


강제징집 녹화공작 피해자 권형택·권혁영씨
진실화해위, 23187명 피해자 공식 인정


1983년 1월, 전역을 약 4개월 앞두고 있던 27살 권형택(66)씨는 영문도 모른 채 보안사 진양분실(서울 중구 퇴계로 진양상가 아파트)로 끌려갔다. 권씨가 마주한 건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 줄 알라”는 보안사령부 조사관의 위협, 그리고 구타였다.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권씨는 보안사에서 관리대상 ‘A급’으로 분류됐고, 진양분실에서 더 가혹한 녹화사업 ‘심사’를 받아야 했다. “첫날부터 폭행이 시작됐어요. 15일간 시퍼런 멍이 가라앉지 않았어요. 창문을 막아 밖을 볼 수도 없는 곳에 갇힌 채 그동안 접촉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전역 뒤 보고해야 할 사항을 지시 받았죠. 감옥도 그런 감옥이 없었어요.”


2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대학생 강제징집 및 프락치 공작 사건’의 국가폭력 피해자로 인정한 권씨와 그의 동료 권혁영(61)씨는 지난 21일 <한겨레>와 만나 40여년간 눌러왔던 고통을 전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날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해 ‘녹화공작’이란 이름으로 범죄 수사와 같은 조사를 통해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전역 뒤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것은 “중대한 인권침해”라며 권씨 등 187명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전두환 정권의 대학생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피해자 권혁영씨는 보안사가 작성한 자신의 존안자료를 지난해 처음 받았다. 1980년 서울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매진한 그는 학내 징계로 지도휴학 처리돼 군에 강제징집된 뒤 정치적 사상을 검증받고, 향후 ‘프락치’로서의 활용 가능성에 대한 심사를 받았다. 존안자료에는 가족 재산은 물론 사촌과 백부의 직업까지 적혀 있었다. 권씨의 연극동아리 회원명, 활동사항 등 그의 입대 전 인생사 및 군의 강요로 쓴 자필 진술서가 90쪽에 걸쳐 나열됐다.

권씨는 “당시 군은 교감인 아버지와 육사 출신인 형의 안위를 볼모 삼아 협박했다. 전역 뒤 복학하자 학군단에서 찾아와 친구들 동향을 파악해 보라며 프락치 노릇을 강요한 게 떠올라 힘들었다”고 했다. 민간인이 된 뒤에도 약 8개월을 시달린 그는 군의 요구와 협박을 참지 못하고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84쪽 분량의 권형택씨 존안자료에도 강제 징집된 뒤인 1981년 11월부터 1983년 6월 전역 직전까지 그의 소속 부대가 권씨의 주변 인물과 발언, 서신 등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해 보낸 39개의 동향보고가 포함됐다. ‘서울대 소요 음모 파악’ 임무 등을 부여받았던 권혁성씨는 “심리적 부담이 너무 컸다. 학생운동을 관두고 이미 취업하거나 대학원에 간 친구들처럼 비교적 ‘안전한’ 이들의 이름을 대거나 발뺌하는 것도 한두번 아닌가. 집으로, 학교로 오는 연락을 피하려면 여길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권형택씨도 “나는 그래도 전역을 앞두고 조사를 받았지만, 군생활이 많이 남은 친구들은 계속 ‘순화교육’을 받고 휴가 기간 동향 보고를 시켰다. 이를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런 군의 공작을 위법한 인권침해라고 인정했지만,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사한 이들의 사망 경위를 밝히는 진실규명은 더디기만 하다. 1983년에만 205보안부대에서 이윤성(5월 사망)씨가 숨진 뒤 김두황(6월), 한영현(7월), 최온순(8월), 한희철(12월)씨 등이 녹화사업에 반항하다가 숨졌다. 권혁성씨는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을 신청한 개인들에 대한 조사를 한 데서 나아가 의문사한 피해자들과 녹화사업의 관련성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군 가해자에 대한 조사도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