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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1/11/16 [경향신문] “인권침해 아닌가요” 세상 바꾼 이웃들 [인권위 20주년 기획]
작성일
2021.11.16
작성자
공익법률지원센터
게시글 내용

2021/11/16 [경향신문] “인권침해 아닌가요” 세상 바꾼 이웃들 [인권위 20주년 기획]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진정사건은 총 8948건이다. 그 중에는 ‘어떻게 이런 작은 이슈를 국가기관에서 다루느냐’며 세상의 비웃음을 산 사건이 적지 않다. 그러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진정사건들이 인권위를 거쳐 세상에 나오는 순간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유죄 아니면 무죄라는 식의 흑백논리를 넘어 세상에 균열을 낸 인권위 권고는 대부분 우리 주변의 이웃이 낸 진정에서 나왔다. 지난 20년 간 평범한 시민이 끊임없이 인권위 문을 두드린 결과 ‘인권의 영역’이 점점 넓어졌다.

차별적인 법과 제도를 시정하는 것만큼 중요한 인권위의 역할은 시민이 일상에서 겪는 인권 침해를 구제하는 일이다. 비정규직 차별 해소, 국가보안법 개정 내지 철폐, 차별금지법 제정 등 인권위 출범 초기부터 화두가 된 굵직한 현안들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 사이 세상을 조금씩 바꾼 것은 시민이 낸 소소한 진정이었다. ‘살색’ 크레파스라는 인종차별적 명칭을 퇴출시킨 것도, 초등학교 출석부 번호를 남학생부터 부여해온 관행을 없앤 것도 평범한 이웃들이 해낸 일이다.

인권위가 오는 25일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인권위 20년사는 곧 시민의 손으로 인권의 지평을 한 뼘 한 뼘 넓힌 시간이었다. 경향신문은 16일부터 3회 연재하는 인권위 20주년 기획기사를 ‘시민’으로 시작한다. 작지만 의미있는 진정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교생 성적표와 고정식 명찰

2005년 대구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전교생의 성적 통지표를 학부모들에게 발송했다. 통지표에는 전교생의 이름과 성적이 고스란히 나열돼 있었다. 김정금씨(61)는 통지표를 모아 서울 중구에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가져갔다. “이 동네 모든 학부모가 그 학교 다니는 아이들 성적을 다 알게 된 거에요. 문제 아닌가요. 그래서 일단 증거 자료가 될 만한 통지표를 들고 인권위로 갔어요.” 김씨가 인권위에 낸 진정은 ‘사립학교는 인권위 소관이 아니다’라며 각하됐지만 그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자 해당 학교는 더 이상 통지표를 보내지 않았다.

김씨는 2009년 다시 인권위를 찾았다. ‘교복에는 명찰’이라는 등식을 당연시하던 때였다. “명찰이 교복에 아예 박음질이 돼서 나오니까, 안 붙일 수가 없었죠.” 그 때만 해도 명찰이 학생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대구 참교육학부모회에서 활동하던 김씨에게 한 학부모가 상담을 요청했다. 학부모는 ‘명찰’ 때문에 아이가 위험에 처할 뻔했다고 했다. 낯선 남성이 하교 중이던 자녀에게 말을 걸었는데 남성이 자녀 이름과 학교, 학년까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복에는 색깔로 학년을 알 수 있는 명찰이 고정돼 있었다. 학생들에게 고정식 명찰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하나같이 부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명찰이 드러나는 게 너무 싫어서 학교에서 나올 때 꼭 명찰을 가릴 수 있는 겉옷을 입는다는 학생도 있었고, 자기 이름이 밝혀지는 게 싫어서 학원갈 때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간다는 애들도 있었죠.”

김씨는 그 때 고정식 명찰의 반인권성을 체감했다. “선생님은 명찰을 달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왜 아이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기 학교와 학년, 이름을 다 밝혀냐 하나, 이건 심각한 인권 침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 해 5월 참교육학부모회는 대구지역 일부 학교의 고정식 명찰을 시정해달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학교 측은 명찰 착용이 교복 분실 방지와 명찰 파손 예방, 학교 밖 일탈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며 맞섰다. 김씨는 학교 측 주장에는 학생을 ‘잠재적 문제아’로 보는 시선이 깔려있다고 생각했다. 2009년 11월 인권위는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및 전국 각 시·도·교육감, 그리고 진정이 접수된 대구 지역 학교의 교장들에게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까지 고정식 명찰을 교복에 부착하도록 하는 관행을 시정할 것을 권고했다.

인권위 권고 이후 학교들은 고정식 명찰 관행을 시정했다. 다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명찰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자 예전으로 돌아간 학교도 있다. “인권위는 우리 학부모나 학생이 호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구예요. 하지만 한계도 있지요. 인권위 권고는 말그대로 권고일 뿐이니까요. 이제 이 권고를 넘어서서 어느 정도 강제력이 부여된 권한이 필요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계부와 학부모 운영위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노.” 김승규씨(65)는 40분이 조금 넘는 대화에서 ‘말도 안 되는’이라는 표현을 11번 사용했다. 경남 김해시 대동면 시골 마을에 살던 그는 2008년 재혼했다. 아내는 8살 딸아이를 데리고 김씨가 살던 곳으로 왔다. 밝은 성격의 아이는 김씨와 금세 가까워졌다. 아내의 딸은 이내 ‘우리 딸’이 됐다.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담임 선생님은 김씨의 아내에게 학부모 운영위원이 돼 달라고 연락했다. 아내가 ‘아이 아빠가 대신 하면 안 되겠냐’고 묻자 흔쾌히 ‘그렇게 하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입후보 지원서를 내자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김씨와 아이의 성이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학교 측은 ‘친부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거지. 우리 애 학교 생활부터 모든 걸 내랑 같이 하고 내가 책임졌는데, 친부가 아니라고 안 된다니.”

출마 여부를 떠나서, 김씨는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싶었다. 학교는 ‘경상남도교육청 지침이라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그 때 언론을 통해 접한 인권위가 떠올랐다. 그는 “법이 이미 그렇게 돼 있다는데 교육청 담당자랑 얘기해서 해결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인권위에 진정을 넣게 됐다”고 말했다. 인권위에 진정을 넣으면서 김씨는 아이와 관련된 모든 기록에 자신의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먹이고, 입히고, 키운 것은 김씨였으나 딸의 학교 생활기록 어디에서도 ‘김승규’ 이름 세 글자를 찾을 수 없었다.

김씨는 ‘계부의 세상’을 조금 바꾸었다. 인권위는 교육부에 학교운영위원회 업무편람 개정을 권고했고, 교육부는 이 권고를 받아들였다. “인권위가 아니었으면 제가 어디 가서 얘기를 했겠습니까. 혼자 욕이나 하고 투덜투덜하다 말았겠지요.” 그러나 김씨는 아직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해졌고, 그에 발맞춰 사회적 제도와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다고요. 요새 사유리 이런 사람도 있다 아입니까. 그게 (법적인) 가족이 아니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지.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앉아 있노.”

■흰머리 카지노 딜러와 염색

김정춘씨(51)는 카지노 딜러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카지노 딜러를 택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성실하게 일했다. 균열은 지난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집안 유전으로 유독 흰머리가 많았던 김씨는 평소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다녔다. 아버지의 49재를 지내는 동안 만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고 싶었다. 그러자 김씨의 머리 색깔을 두고 회사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서비스업인데…” 영업부장 등 임원들은 김씨를 불러 흰머리를 염색하라고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무엇이든 순순히 따르기보다 “왜 그래야 하지?”라고 되묻는 편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김씨는 염색을 하지 않았다.

3주가 지나자 회사는 사유서를 내밀었다. ‘머리 염색을 하지 않고 새치인 상태로 근무해 회사의 용모 준수사항인 그루밍(Grooming)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사유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인권위에 진정을 내고 회사의 그루밍 규정 개선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였다. 인권위는 김씨의 진정을 받아들였다. 회사의 염색 요구를 ‘용모 차별’로 봤다. “흰머리 여부는 카지노 딜러 업무에 영향을 준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인권위 판단이었다.

회사가 김씨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원래’였다. ‘원래 서비스업은’, ‘원래 회사에서는’, ‘원래 카지노에서는’… 그럴 때마다 김씨는 ‘원래’라는 말로 응수했다. “원래가 뭔데요? 원래 사람은 나체였어요!” 대놓고 말은 안 했어도 주변 동료들 9할은 김씨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김씨에게 인권위는 ‘마지막’이었다. “여기 아니면 내 얘기를 들어줄 곳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것이었다. 흰머리 하나 때문에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김씨의 대답은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다. “제 자식들은 그런 세상에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회사와 싸우면서 유난히 딸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우리 자식 세대는 적어도 지금보다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작은 거라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