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대학교회

모바일 메뉴 열기
 
전체메뉴
모바일 메뉴 닫기
 

예배/기도회

예배 동영상

제목
6월3일 주일설교-정종훈목사(제가 여기 있습니다.)
작성일
2018.06.05
작성자
대학교회
게시글 내용


연세대학교회 2018. 6. 3. 오순절 후 두 번째 주일

제가 여기 있습니다 (삼상 3:1-10, 고후 4:5-12, 막 2:23-3:6)

오순절 후 두 번째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대학교회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종종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과연 있는 것인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정말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일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인가?” 지정학적인 위치를 단순하게 묻는 질문이라면 당장에 대답할 수 있을 텐데, 이 질문을 하고 나면 괜히 심각해지고,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에 드는 대답을 당장 할 수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질문하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오늘 사무엘상 3장의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고, 자꾸 엘리 제사장에게로 나아갑니다. 사무엘이 그를 부르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것은 문제였지만, 부르는 상대에게 곧바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비범한 일이었습니다. 아예 자거나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느라고, 부름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사무엘은 누구든 자기를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도록 깨어 있었고, 설사 잠자리에서조차도 부름에 순종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름을 의식했을 때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열정을 다해서 달려갔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찾아오실 때, 언제나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십니다. 사람의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이란 단지 그 이름의 주인공을 부르기 위한 호칭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름은 이름을 지닌 사람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직접 부르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에 하나님의 전존재가 담겨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텍스트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할 때는 그들 자신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다시 돌아본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기록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읽을 때는 감히 입에다 담을 수가 없어서 ‘아도나이’(adonai)라는 ‘주님’이란 뜻의 다른 말로 대체해서 읽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오리지널 음가를 잃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역시 인간을 부르실 때는, 어떤 인간을 단지 부르기만 하려는 수단으로서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름을 지닌 인간의 전존재를 기억하시면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피상적으로 알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모태 안에 조성되기 전 과거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고, 우리의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를 여실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조차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특정하여 부르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존재를 전제하고 부르신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관련한 제 3자들에게까지도 특별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이 쓴 시 가운데 ‘꽃’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이 시 역시도 이름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각인시켜 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처럼 우리는 이름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전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고, 사물적인 대상에서 비로소 인간으로서 우뚝 서서 정겨운 관계를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짐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인격적인 존재로서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전인격적인 존재로서 대접하겠다고 작정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깨뜨리고 말았던 죄인,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듯이 아담에게 질문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아, 나의 형상으로서 존귀하고 아름답게 창조된 아담아, 너는 왜 너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냐? 아담아, 나는 네가 홀로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서로 도우면서 살라고 하와를 이끌어주었단다. 그런데 너는 어찌해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방관했고, 나중에는 너까지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던 것이냐? 아담아, 나는 너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너는 왜 나를 두려워하면서 피하려고 하는 것이냐?”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동생을 돌로 쳐 죽임으로써 우애있는 형제의 관계를 깨뜨리고 말았던 죄인, 카인에게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를 물으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몰라서 스무고개 놀이를 하듯이 카인에게 질문하며 아벨의 있는 곳을 찾으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인아, 너는 너와 친밀하게 살아야 할 아벨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카인아, 너는 어찌해서 네가 책임지고 사랑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아벨을 살해까지 했던 것이냐? 카인아, 너는 내가 너 못지않게 아벨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냐?”

아담과 카인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리고 사무엘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면서 찾아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확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성서정과의 본문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누구 앞에 서 있는지, 그리고 누구 앞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처음에는 엘리 제사장 앞에 서 있는 엘리 제사장의 종이었습니다. 어머니 한나가 자신을 엘리 제사장에게로 데려와서 그를 섬기도록 했기 때문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을 그의 주인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에게 살 권리를 주셨으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영광을 거두시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데서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기보다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 앞에서 그것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면서 서 있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권력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권력 앞에서 비굴할 정도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황금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황금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권력이든, 황금이든, 이해관계든, 하나님께서 훅 하고 불면, 당장에 날아가 버릴 먼지와 같은 것들입니다. 모든 것을 원 없이 누렸던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자신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 같은 자기 안에 예수라는 보물을 담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했고, 주님의 종으로서 다른 사람의 종이 될 것을 기꺼이 자처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약자들을 자신의 도구로 삼기보다는 당신 자신을 대하듯이 대하면서 그들의 절실한 필요를 즉시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이후에는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주님이 살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했습니다. 그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소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심지어 죽음 앞에 직면할 때조차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길이라고 알았기에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랑하는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부끄럽게도 욕망과 정욕을 가득 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라는 보물을 담고 있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큰 능력을 행세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 안에 예수를 담고 있다면,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을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보물보다 귀한 예수를 담아 예수를 위해서 작은 예수가 되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어떤 삶의 가치를 붙들고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삶의 가치를 붙들어야 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의 본래적인 동기, 생명과 사랑의 가치를 붙들지 않고, 안식일 계명으로부터 파생된 율법,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하부 규정의 껍데기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픈 예수의 제자들이 밀밭에서 밀 이삭을 잘라 먹으려 하자, 그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일을 했기 때문에 안식일 율법 규정을 어겼다며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들어 고통스럽게 살던 사람의 손을 고쳐주자,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했다고 예수를 죽일 모의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안식일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신 이유가 창조하느라 피곤해서 쉬시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땀 흘려 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일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식일을 통해서 가르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자신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일해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확인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예를 거느린 주인들은 언제라도 쉴 수 있었지만, 노예나 사회적인 약자들은 자유롭게 쉴 수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안식일만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안식하며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의 생명 하나하나가 매우 소중하다는 것과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식일에 깨닫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주일은 우리의 안식일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것을 결심하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맞습니까? 진리와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를 보물보다 귀한 분으로 우리 안에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까? 진정한 삶의 가치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붙들고, 그 사랑을 실행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무관심과 무능력, 무책임이 팽배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 앞에서 예수의 생명을 담아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제 선포된 말씀으로 묵상기도 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