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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월12일 주일설교-김홍일신부(생명의 빵)
작성일
2018.08.12
작성자
대학교회
게시글 내용

생명의 빵

삼하 18:5–9,15,31–33, 에페 4:25–5:2, 요한 6:35,41–51

오늘 복음말씀인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를 시작으로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긴 담화(談話)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와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긴 담화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이야기와 오버랩 시키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만나는 출애굽한 히브리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먹었던 양식입니다. 만나는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이 자유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훈련을 받던 광야의 양식입니다. 오늘 요한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히브리 민족이 먹었던 양식인 만나와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여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먹어야 할 생명의 빵이신 예수를 대비시키며 긴 담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긴 담화 가운데 한 부분인데, 길지 않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하여 자신이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가져 다 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빵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 간 만나와 달리 먹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는 이 선언은 어쩌면 오병이어 기적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 안드레에게 하셨던 질문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하여 몰려오는 큰 군중들을 보시고 ‘이 사람들을 다 먹일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느냐?’고 안드레에게 물으십니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만한 빵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느냐?’는 이 질문은 인류역사에서 많은 정치가들과 혁명가들 그리고 학자들이 반복하여 물어 온 인류의 근본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이 많은 군중들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온다고 해도 모자라겠다.’고 대답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군중들을 흩어서 제 각기 사먹고 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빠르게 상황을 평가하고, 자신들이 지닌 자원을 계산 해 보고,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판단과 대답입니다. 아마 우리도 대부분 그 상황에서 그렇게 대답하였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지 가서 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던 군중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 때 한 어린아이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가지고 오고,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고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도 ‘빵’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빵이 의미하는 바는 사뭇 다르고, 그 간극은 평행선처럼 이어집니다.

요사이 사람들 사이에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많이 높아졌습니다. 집에 T,V가 없는 저도 방송에서 먹거리와 관련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의 건강과 삶 많은 영향을 준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일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사람은 그가 먹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많은 경우 개인의 건강이나 미용 혹은 가족을 향한 관심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밥을 먹는 식탁의 자리는 배에 허기를 채우는 자리만이 아니라 식탁에 모인 사람들이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그 식탁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식탁의 자리를 죄인이라고 여겨지던 세리와 창녀, 병자와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환대하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로 만드셨습니다. 주님의 식탁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지상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전통이 되었지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밥을 준비하기 위해 쌀독에서 쌀을 퍼내며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느님을 향해 감사드리며, 배고픈 이웃을 위한 성미를 따로 모으는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동화 같은 소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벌을 받고 세상으로 내려 온 천사 미하일은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가기 위해 지상에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미하일이 하느님께 받은 질문은 세 가지는, 첫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둘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 셋째 질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였습니다. 천사 미하일은 구두장이 시몬 부부의 호의로 그의 집에서 머물며 기술을 배웠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만나며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습니다. 첫 번째 답은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것, 둘째 질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하여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살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을 살게 하는 양식은 무입니까? 하고 묻고 있습니다.

마태, 누가, 마가 세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식사에 대하여 자세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직 요한복음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마지막 만찬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서학자들은 요한이 그것을 생략한 것이라기보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 6장을 통해 마지막 만찬에 대한 요한 공동체의 묵상을 더 깊고 길게 전달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라고 하셨을 때, 군중들이 동요합니다. 이 때 사용된 ‘수근 거렸다’는 단어는 70인역 성경 출애굽기 14장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쫒아오는 파라오의 군대를 보고 모세를 불신하며 불평할 때 사용하였던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합니다. 군중들은 생명의 빵이라는 표현보다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표현에 마음이 더 편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는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라고 예수를 비난하며 조소합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의 인간성이 군중들에게는 하느님 아들 되심을 드러내는 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줄 생명의 빵은 ‘나의 살’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는 육화의 선언으로 복음을 시작한 요한은 다시금 자신의 성육신 신학을 강한 어조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거룩하고 한량없는 사랑은 접촉하고, 어루만지고, 포옹하는 몸의 언어로 더 온전하게 드러나고, 표현되고,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람들과 나누신 식탁에서는 이념, 성격, 성별, 민족, 신분, 지위... 사람들을 갈라놓고, 서열화 시키는 온갖 경계와 차별의 벽이 허물어지고,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됩니다. 그곳에는 무차별적이고 조건 없는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이 흘러넘치고, 그 사랑 안에서 사람들은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화해와 일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화해와 일치는 우리의 노력과 의지를 넘어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 이루시는 신비입니다. 하여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화해와 일치의 자리에 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량없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자신을 비우고, 그 사랑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일 뿐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던 하느님은 이제 인류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으로, 그 빵으로 하느님 안에서 자매와 형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며,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기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친교는 우리 모두를 형제와 자매로 이어줍니다. 교우들이 서로를 향하여 형제나 자매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나 자매가 어려운 것을 보고 어떻게 모른 채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나 자매가 굶주리는 것을 보고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나누어지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은 곧 하늘나라이며,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생명의 빵’입니다. 생명의 빵이 있다면 죽음의 빵도 있습니다. 죽음의 빵은 무엇입니까? 죽음의 빵은 우리의 분리시키고, 단절시켜 경쟁과 이기심 그리고 분열과 소외와 고립으로 우리를 내모는 모든 것들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아야 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일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얻는 빵으로 우리가 배부르고, 그 빵으로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빵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고, 그 허기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거짓 문화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은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처참한 죽음을 통고받고 슬퍼하며 한탄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직한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불의하게 취하였고, 압살롬은 자기 누이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이복형제 암논을 죽이고, 아버지 다윗까지 반역하여 왕권을 찬탈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이었고,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 가운데 가장 총명하고 뛰어났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국가를 자신의 소유처럼 운영한 죄를 지었습니다. 백성과 자신을 분리시킨 권력의 자기중심성은 권력자 자신만이 아니라 한 나라와 국민들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대통령의 탄핵과정에서 그 뼈저린 역사적 교훈을 몸으로 경험하고 배웠습니다. 그 모든 비극은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이라는 죽음의 빵이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기아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는 민간단체 World Hunger에 의하면 지구 전체인구 10명 가운데 7명은 영양부족이거나 배고픈 사람들 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매일 지구 어디에선가 3만 4천 명의 어린이들이 기아나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인도 켈커타에서 오랫동안 노숙인과 외롭게 죽어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마더 데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린 것은 먹을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고 우리가 나누지 않아서’라고 말했습니다. 인류가 지금도 씨름하고 있는 굶주림과 기아의 문제는 먹을 양식이 모자라서가 아니고 그들에게 이웃이 되어주지 못하는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형제와 자매가 되어 주지 못한 결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이야기를 생략하는 대신 잡히시던 전날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식탁에서 예수님은 빵을 드신 대신 수건을 드셨습니다. 요한은 이웃을 돌보는 섬김의 사랑이야말로 성찬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셨던 마지막 유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성찬의 자리에서 이웃에 궁핍함에 무관심한 신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태도와 행동은 성찬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생명의 빵입니다. 아직도 분단과 냉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반도에, 삼포에서 N포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내전으로 조국을 떠나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난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입니다. 빵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 생명의 빵을 먹고, 생명의 빵이 되어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 빵을 먹고, 생명의 빵이 되어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첨부
20180812-Rev. 김홍일 신부 생명의 빵.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