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대학교회

모바일 메뉴 열기
 
전체메뉴
모바일 메뉴 닫기
 

자료실

일반 자료실

제목
<담임목사 칼럼 : 목숨과 생명의 차이>
작성일
2021.05.22
작성자
대학교회
게시글 내용
  1. 목숨과 생명의 차이

  2. 인류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4층이 없는 건물이 많다. 4라는 숫자가 죽을 ‘사(死)’자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를 짓게 했던 파라오나 불로초를 찾게 했던 진시황이나 이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단 한 가지, 죽음만은 예외였다.
  3.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음은 그 자체로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악은 아니다. 우리는 수(壽)를 다 누리고 맞는 죽음을 저주로 여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모든 생명이 거쳐야 하는 마지막 단계로 받아들인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비참한 죽음, 비극적인 죽음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생물학적 현상으로서의 죽음 자체가 아니고 비참과 비극이고, 죽음보다 더 아픈 고통이다. 이 경우 죽음이라는 단어는 문자적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니고 근원적 악과 비참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쓰이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로 직접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로 구별해 이해할 수 있다.
  4. 생명의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목숨과 생명, 죽음과 사망을 구별하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목숨과 죽음은 생물학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생명과 사망이라는 용어는 상징적 혹은 영적 측면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다석 류영모는 생명이란 살라는 명령인데, 그냥 살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찾아서 살라는 명령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망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며 사는 것을 말한다. 생물학적 죽음(死)보다는 망(亡)한 삶이라는 뜻이 사망이라는 단어에서 강조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상태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목숨+생명’ ‘목숨+사망’ ‘죽음+생명’ ‘죽음+사망’. 앞의 두 상태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이고, 뒤의 두 상태는 목숨이 끊어진 후의 상태이다. 세상 사람들은 앞의 두 상태에만 관심을 두지만 기독교인들은 뒤의 두 상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5.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예수는 마르다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이 말씀은 사고실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그 뜻을 새겨볼 수 있다. 나는 부활(생명)이요 생명(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죽음) 살고(생명), 살아서(목숨)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사망) 아니할 것이다(생명).
  6. 이 말씀에 의하면 생명은 우리가 죽어서도 계속 누릴 수 있지만, 생명을 선택할 기회는 우리에게 목숨이 붙어 있을 때만 주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생명(상징적으로 영생, 부활, 구원, 천국을 다 포함)을 체험하는 것은 죽고 나서가 아니고 바로 지금부터이다. 많은 비기독교인이 기독교는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믿는 종교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부터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 새로운 생명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될 영생의 시작이다. 죽음은 다른 방으로 건너갈 때 덜컹거리는 문지방과 같을 뿐이고, 하나님은 죽음 이전이나 이후에도 한결같이 생명을 품고 보호하신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7. 우리는 코로나19로 주위에서 수많은 죽음을 본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죽음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닥칠 수 있었다. 죽음에 대비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이 자신과 이웃의 삶을 가득 채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하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삶이다.
  8. 이대성 (국민일보 바이블시론, 20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