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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캠퍼스 산책 (2008.03.16)
작성일
2022.12.30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환갑의 세월을 보낸 연세대 영문과. 1946년에서 2006년 오늘에 이르는 동안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도 많고, 한 때 아름답던 그 얼굴이 시간의 갈퀴에 긁히고 있는 분들도 많으며, 연세의 교정을 새로이 채우는 힘찬 젊음은 더욱 많아졌다.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그 푸른 낱말을 앞세우고 일상을 넘어 이상을 이야기하던 연세의 언덕들은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다. 배움터를 떠난 몸으로 생업에 힘쓰다가도 세월의 길목을 돌아 문득 되찾아 보고 싶어지는 곳, 그 추억의 동산에 다시 들어서 보자.


백양로!

30만여 평 교지(校地)에 들어서는 관문. 연세를 모교로 하는 모든 이들이 사색하던 길이요, 신화의 가로이며, 추억이 아로새겨진 산책로이다. 1930년경 좌우로 도열하여 심겨졌던 백양목이 언제부턴가 은행나무로 바뀌어 그 이름이 무색해졌지만,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연세인을 반겨주는 모습은 의구(依舊)하여 변함이 없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며 곳곳에 자리잡은 건물들 사이로 펼쳐지는 유서(由緖)들을 동문 제위께서는 모두 기억하시는가.

 

독수리상! 

연세의 표상을 세우려는 학생들의 염원이 실행에 옮겨져 학생들 스스로 700여 만 원의 기금을 모아 창립 85주년 개교기념일인 1970년 5월 9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총 높이 12.3m로, 8.5m의 사각탑신 위에 청동으로 만든 2.5톤의 독수리가 세워졌고, 몸체 네 귀퉁이에는 진리와 자유 수호에 이바지할 연세인의 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총학생회의 건립취지문이 새겨져 있다. 푸른 하늘에 나래를 펼치고 나는 독수리! 창공은 이상과 지성과 희망의 상징이요, 독수리에게 있어서는 한없는 자유의 공간이다. 독수리와 푸른색 속에는 진리와 자유라는 연세의 교훈이 스며 있다.


언더우드 동상!

두 번의 수난을 거쳐 세 번째로 복원된 것이 이 동상이다. 첫 번째 동상은 일제하인 1928년 4월 24일 연희학원의 한국인 직원모임인 우애회(友愛會)와 사회인사의 협동으로 세웠으나 왜정 말기 그네들의 손에 빼앗겼다. 해방 후 동문과 사회인사의 뜻으로 1948년 10월 16일 건립된 것이 두 번째의 동상인데, 6·25 동란으로 공산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의 동상은 연희의 첫 배움터인 연희전문학교가 창립된 지 40주년이 되는 1955년 4월 22일 세 번째로 다시 세워진 것이다.


노천극장! 

1932년 밀러(Miller) 박사에 의하여 설계되어 1933년 5월 준공되었으며, 공사가 시작되면서 교직원 및 학생 전원이 각각 하루씩 작업을 도왔다. 대강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연희의 정신을 길러주고 마음을 가꾸어 주던 곳이다. 연고전 응원연습, 졸업식, 연극공연 등 노천극장에 얽힌 추억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57년 여름 보수공사를 거쳤으며, 현재의 노천극장은 동문들의 성금을 모아 1999년 5월 준공된 현대식 건축물이다.


연세 한글탑!

한글은 우리 겨레 얼의 상징이요, 우리 문화 창조의 힘이다. 일찍이 연세는 진리와 자유의 이념 아래 어려운 역사 속에서도 몸과 마음을 바쳐 우리말과 글을 갈고 닦아 지키고 폄으로써 나라사랑과 학문정신을 드높임에 크게 이바지하여 왔다. 이러한 연세의 정신적 전통을 기리고 이를 이어받아 더욱 다져서 온 누리에 한글의 슬기와 연세의 이상이 넘치도록 힘쓸 것을 다짐하는 뜻으로 1992년 5월 9일에 세워진 것이 연세 한글탑이다.


윤동주 시비!

시인 윤동주는 민족의 수난기였던 1917년 독립운동의 거점 북간도 명동에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1938년 봄 연희동산을 찾아 1941년에 문과를 마쳤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며 항일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모진 형벌로 29세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며 지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밝혔으며, 그 영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1968년 11월 3일 그를 따르고 아끼는 학생, 동문, 친지 및 사회 인사들이 정성을 모아 핀슨홀 앞 작은 언덕에 그의 시 한 수를 새겨 시비를 세웠다.


그리고 국학자 얼굴상 넷!

일제의 압제 속에서 스러져 가는 민족정신을 소생시키기 위해 몸 바쳐 국학 연구의 토대를 닦아 그 부흥에 앞장섰던 위당 정인보, 외솔 최현배, 한결 김윤경, 홍이섭 선생의 얼굴상이 세워진 것을 모르는 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네 분 선생의 학문적 열의와 겨레 사랑의 정신을 받들고자 1994년 10월 31일에 얼굴상이 봉헌되었기 때문이다. 위당 얼굴상은 위당관 좌측 입구, 외솔 얼굴상은 외솔관 앞 화단, 한결 얼굴상은 노천극장 입구에 세워졌으며, 홍이섭 선생의 얼굴상은 윤동주 시비 아래쪽의 화단에 위치해 있다.


발걸음을 다시 백양로로 옮겨 좀 더 역사적인 관점에서 무악의 줄기를 바라보자. 오른편으로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묘인 수경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이 무악의 동맥이고, 다른 편으로는 서맥이 뻗쳐 있다. 무악의 동맥과 서맥 사이로 관악을 바라보며 푸른 언덕이 길게 나 있으니, 이 대야평이 세종 때 세운 연희궁의 터이다. 연세의 배움터는 만 여 평에 달하는 이 유서 깊은 터에서 한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들어 민족의 갈 길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관악산 바라보며 무악에 둘러, 유유히 굽이치는 한강을 안고, 푸르고 맑은 정기 하늘까지 뻗치는, 연세 숲에 우뚝 솟은 학문의 전당”이 바로 이곳이다.

그런데 ‘무악’이니 ‘수경원’이니 ‘대야평’이니 ‘연희궁’이니 하는 것은 역사의 어떤 대목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위에 언급된 순서대로 그 내력을 살펴보자.


무악(毋岳). 무악은 태조와 태종에 이르는 동안 이른바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 내지 무악천도론(毋岳遷都論)의 대상이 되던 곳으로 당시의 여러 중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으나 태종은 무악 남록(南麓)의 명당을 잊지 못하고 세종을 시켜 연희궁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무악의 영봉(靈峰)들은 인조(仁祖) 때 이괄(李适)의 난을 결정적으로 참패시켜 반란을 진정시킨 곳이며, 6·25 전쟁 때 자유수호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승리를 가져온 ‘연희 고지’가 바로 이곳이다.


수경원(綬慶圓). 무악 남쪽 동맥의 기슭, 대학 입구에 있는 노괴목(老槐木)의 바른 편에 자리잡은 묘역 일대가 수경원이다. 이곳은 즉위에 앞서 무고(誣告)로 뒤주에 갇혀 굶어서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어머니이신 영조의 후궁 영빈(映嬪) 이씨의 원묘이다. 환경과 위치의 부적절성 그리고 관리 곤란 등의 문제가 제기되어 수경원은 1971년 9월 8일 경기도 고양 소재의 서오릉으로 옮겨졌다.


대야평(大野坪). 현재의 학교터 일대를 대야평이라 부르게 됨은, 수경원에 세워진 영빈이씨의 원묘 앞의 묘비에 연유한다. 그 묘비의 한 구절에 “이 묘를 양주 연희궁 대야동(楊州 衍禧宮 大野洞)에 세운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일대가 대야평이라고 불려졌던 것이 틀림없는 사실로서, 이것이 현재의 학교터를 대야평이라 일컫게 된 배경이다. 대야평을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물길을 창내(倉川)라 불렀는데, 이로부터 유래한 것이 ‘창천동’이다.


연희궁(延禧宮). 연세대학교 현 교지의 일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연희궁 터는 무악의 핵심지로서, 세종 2년(1420년)에 상왕 태종의 하명에 따라 이곳에 지어진 것이 연희궁이다. 세종은 태종을 상왕으로 모시어 기거하게 하려고 이궁(離宮) 즉 서리궁(西離宮)을 지었는데, 이 서리궁이 연희궁으로 궁호를 받게 된 것은 태종이 돌아가신 후 세종 7년 때의 일이다. 그 다음 해인 1426년 세종은 연희궁을 수리하여 왕비와 함께 옮겨 거처한 일이 있었으나 세종 10년 이후 연희궁은 과수원으로 꾸며져 재정보완을 위한 과물 증산장으로 이용된 일도 있었고 성종 시대에 와서는 상전서잠실(桑田西蠶室) 즉 누에치는 곳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 시대에 궁의 하나로 다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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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연세대 영문과의 성립 (2008.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