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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제1부 연세대 영문과의 성립 (2008.03.16)
작성일
2022.12.30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1장 연세대학교의 성립


1915년 Chosun Christian College로 개교하여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승격 인가된 연희대학교 그리고 1885년 광혜원에서 출발하여 1947년 8월 대학으로 인가된 세브란스 의과대학, 이 두 기관이 한 뜻으로 합쳐져 1957년 1월 5일에 종합대학으로 발족한 것이 연세대학교이다. 합동의 필요성은 이미 1928년부터 대두된 바 있었으나, 두 기관의 이사회가 재단법인 연세대학교를 구성하는 데에 정식으로 합의를 본 것은 1955년에 이르러서였고, 1956년 재단법인 설립 정관이 완성됨으로써 1957년 1월 5일 연세대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영문과 역사의 뿌리를 연희대학교 및 연세대학교 성립과정 속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 연희대학교


연희대학교의 모체는 연희전문학교다. 후자는 1915년 3월 미국 뉴욕의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적극적인 추진력에 재한 남·북 감리교 선교부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협조가 어우러져 Chosun Christian College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청년연합회(YMCA)에서 문과, 수물과, 상과, 농과, 신과 분야의 과목들이 최초로 개강되었으며, 2년 후인 1917년 (응용화학과, 농과를 추가 개설하면서) 한국 유일의 사립교육기관인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명명되었다가. 그 후 1923년 3월에 새로운 교육령에 의해 교명이 “연희전문학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는 그 건립이념이 그러했듯이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던 1919년부터 시종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선양했으며, 일제하에 독립정신을 앙양하는 가운데 항일 운동의 총본산 역할을 함으로써 가혹한 사상적 탄압의 대상이 되곤 했다. 1938년 4월부터는 일본어와 일본사를 강요당했고, 1944년 4월에는 본 대학교가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몰수되기도 했다. 무수한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자 총독부는 한국인 간부와 교수진을 추방하고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고쳐 1945년 8월 15일에까지 이르렀다.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자 백낙준, 유억겸, 이춘호, 김윤경, 이묘묵, 조의설, 김성권 등 7인으로 구성된 ‘접수위원회’는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의 학교 재산과 운영권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받고,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회복하였으며 유억겸 선생이 교장으로 있다가 1945년 12월 18일 백낙준 박사가 후임으로 취임하였다. 현재의 교지(校地)는 1917년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기금으로 구입된 것이고, 스팀슨(Charles Stimson)의 기부금으로 스팀슨홀이 건립되면서 1920년에 캠퍼스가 정착된 것이다.

백낙준 박사는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을 목표로 대학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1946년 8월 15일 연희전문학교는 연희대학교로 승격 인가되어 4개 학원 11개 학과(문학원―국문학과, 영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정치외교과; 상학원―상학과, 경제학과; 이학원―수학과, 물리기상학과, 화학과; 신학원―신학과)를 갖추게 되었다. 1949년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 예과를 본 대학교에 두었으며, 1950년 연희대학교 제1회 졸업생을 배출시켰고, 같은 해에는 ‘학원’을 ‘대학’으로 개칭하여 문과대학에 교육학과와 법학과를, 그리고 이공대학에 생물학과, 전기공학과, 공업화학과, 의예과를 증설하여 17개 학과로 증설함으로써 4개 대학 17개 학과를 갖춤과 동시에 대학원도 신설하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으로 인해 3개월간 임시 휴교가 선포되었고, 수도 탈환 이후 11월 3일 재등록을 받아 개강하였으나 또다시 1·4후퇴로 학교가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1년 10월 3일 부산 영도에 천막을 치고 개강하는 한편, 1952년 목조 가교사를 낙성하여 강의가 계속되었다. 정부 환도 후 1953년 8월 학교도 서울 본교로 환도하였으며, 당시의 부산 영도 가교사는 부산 분교, 부산 연세실업초급대학을 거쳐 여학생만을 수용하는 가정대학으로 개관되었다.

본교는 날로 확장이 거듭되어 1954년 정법대학을 신설하여 정치외교학과와 법학과를 두었으며, 1955년에는 종교음악의 지도자 배출을 위하여 신과대학에 종교음악과를 신설하였다. 특히 연희대학교로 승격한 이후 본 대학교는 대학의 운영에서 교육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학교의 선구적 역할을 다하여 왔다.


 2. 연세대학교


1957년 1월 5일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숙원의 합병을 성취하고 문교부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연세대학교로 새 출발을 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다졌다. 일찍이 1954년부터 과학관, 대강당, 체육관 등의 준공으로 시설을 확장하였고, 1955년에는 의료시설의 현대화를 위하여 미국 차이나 메디컬 보드(China Medical Board)로부터 기금을 기부받았으며,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연희대학교와 합병한 지 몇 년 후인 1962년 8월에는 주한 미8군의 도움으로 메디컬센터(Medical Center)가 준공되어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이 서울 역전에서 신촌 캠퍼스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로써 세계적인 종합대학교로 발돋움할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1957년 ‘연세대학교’가 성립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동문 제위의 역사적 회고를 위해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으나,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전개된 학과 및 단과대학 증설, 대폭적인 학사기구 개편 등등에 대해 여기서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006년 현재의 연세대학교는 원주캠퍼스를 포함하여 20개 단과대학과 92개 학과 그리고 18개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속교육기관 4개, 부속기관 21개, 대학교부설연구소 27개, 대학부설연구소 85개, 대학원부설연구소 4개, 대학간 연구소 15개, 기타기관 10개를 운영하는 세계적 사학기관이라는 점, 이를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리라 본다. 이에 관한 세부 사항에 관심이 있는 분은 학교의 관련 기관을 통해 필요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첨언해 두기로 한다.


2장 문과대학의 성립과 변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은 1915년 4월 Chosun Christian College 개교 당시 문과로(수물과, 상과, 농과, 신과와 함께) 개설되어, 1917년 2월 사립 연희전문학교가 발족되면서(신과, 상과, 수물과, 응용화학과, 농과와 함께)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우리나라 문과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 연세대 문과대학인 것이다. 그 성립과정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1946년 8월 연희전문학교가 종합대학인 연희대학교로 승격했으며, 그때 전문학교의 문과는 문학원으로 개편되어 국문과, 영문과, 사학과, 철학과, 정치외교학과의 5개 학과로 구성되었다. 1950년 5월에는 문학원이 ‘문과대학’으로 개편되면서 교육학과가 신설되었다. 동시에 정치외교학과는 새로 개설된 법학과와 더불어 정법대학에 소속됨으로써 문과대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이후 1956년 12월에는 도서관학과, 1971년 12월에는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사회학과가, 1973년 12월에는 중어중문학과가 각각 증설되었다. 1981년에 이르러서는 교육학과가 학교기구 개편에 따라 신설된 교육과학대학으로 그 소속을 옮겼고, 동년 12월에는 심리학과가 문과대학에 신설되었다. 1989년 10월에는 노어노문학과가 신설되어 문과대학은 총 11개 학과로 되었다. 도서관학과가 문헌정보학과로 명칭변경을 한 것은 1990년 10월이다.

1996학년도부터는 인문학부제가 시행되어 (후술할) 혼란현상이 다소 생겼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1997년부터는 11개학과 중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노어노문학과의 3개학과가 ‘유럽어문학부’로, 그리고 8개 학과는 ‘인문학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2004년 3월에는 학문의 성격상 사회학과가 사회과학대학으로 소속을 변경함으로써 문과대학은 현재 7개학과를 주축으로 하는 인문학부와 나머지 3개학과를 주축으로 하는 유럽어문학부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문과대학은 순수학문의 요람이요, 인문과학 연구의 전당이다. 이에 맞추어 문과대학은 1957년부터 학술지 『인문과학』을 발행하다가 1964년에는 인문과학연구소를 설치하고, 그 기관지를 『인문과학』으로 하여 매년 간행하고 있다. 또한 1992년 3월에는 문과대학 내에 번역문학연구소, 사회발전연구소, 인간행동연구소가 신설되었다.

문과대학은 이 나라 여명기에 문과로 발족한 가장 오랜 역사와 더불어 전통을 형성함으로써, 그 동안 우리나라 인문학계를 육성하는 데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설립 초기부터 국학과 인문학의 최고 석학을 교수진으로 한 문과대학은 나라 안팎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나라 안으로는 우리대학, 나아가서는 이 나라 국학과 인문학의 전당으로 그 초석을 다졌을 뿐 아니라, 이 분야에 뚜렷한 학맥을 형성하면서 명실상부하게 연세학파의 중심이 되어 있다. 나라 밖으로는 세계 인문학의 교류에 앞장서 왔음은 물론 학문과 문화의 국제적 지위를 형성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해 왔다. 문과대학은 또한 언론과 문화계에도 많은 인재를 배출함으로써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해왔다. 인문학 탐구와 나라의 인재양성, 민족문화의 계승 발전은 문과대학의 역사적 사명이다(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창회가 간행한 2001년도 『연문동연록』, 5쪽 참조).

3장 영문과의 성립과 연세대 영어교육


1917년 2월에 인가된 연희전문학교는 1944년 6월 1일에 폐교되고 일제의 강압에 의해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4년제로부터 3년제로 격하되었다. 당시 입학생은 총 150명이었으나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12월 5일에 정식 개강하면서 편입생을 모집하여 다소 증원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46년 8월 15일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어 4개 학원 11개 학과의 종합대학교로 인가되었는데, 영문과는 이때 신설되었다.

연세대학교는 설립 당시부터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고, 현대 학문을 도입하여 고등교육을 보급함으로써 쇠퇴일로의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부흥시키고 나라의 자강(自强)을 도모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런 교육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 중의 하나는 그 도구가 되는 언어능력을 배양해 주는 것이었다. 이에 1917년 4월 17일 연희전문학교가 인가되면서부터 세계의 공용어라 할 수 있는 영어에 역점을 두게 되었고, 따라서 처음부터 영어교육은 연세교육의 특색 중 하나였다. 영어 자체가 교육의 목적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영어교육을 통한 신학문의 도입이라는 선구적 전통은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는 현대학문을 수용 내지 보급하거나 영어영문학의 기초를 형성해 주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촉매가 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초창기에는 원한경(H. H. Underwood, 1917 재직), 피셔(F. E. Fisher, 1928 재직), 스피달(G.C. Speidal, 1931 재직), 케이블(E. M. Cable, 1932 재직) 등 여러 명의 외국인들이 직접 영어를 가르쳤고, 거의 모든 집회 때마다 영어를 사용하는 예가 많아서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연세대학교 백년사 1』(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163쪽에 실린 1921년 문과 학정표에 의하면 ‘영어영문학’(읽기, 회화, 해석, 쓰기, 암송, 작품)이라는 과목으로 졸업할 때까지 24학점 32시간을 이수하도록 되어 있었고, 1938년 문과 학정표에 따르면 영어영문학(문법 강독 서취) 21시간, 작문 수사학 8시간, 음성학 회화 9시간, 영문학사 6시간으로 졸업할 때까지 도합 44시간을 이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1925년부터 1940년 사이 내국인으로서 해외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인물들이 대거 전임으로 부임하면서 영어교육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학술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홍승국(1952∼63 재직), 정인섭(1929∼46 재직), 하경덕(1933 재직), 이양하(1934∼41 재직), 이묘묵(1922년 연전 졸, 1934 재직), 김선기(1930년 연전 졸, 1938∼42, 1945∼47 재직) 등이 그 대표적 예로, 이들은 모두 유능한 학자들로서 영어교육에 진력하는 한편, 영문학의 소개 또는 번역 등을 통하여 초창기 한국 영어영문학 분야에 개척자적인 역할을 했고 학문연구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 중 수필의 개척자이자 고매한 시인이었던 이양하(1904∼1963) 교수의 역할은 특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1930년 동경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4년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영어와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영문학계를 세워 나가는 선도적 역할을 했다. 1950년 도미하여 하버드 대학원에서 수학 후 귀국했다가 1953년 미국 학술원의 초청으로 다시 도미, 예일대 교수와 함께 『한영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후일 그는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지만, 연희전문학교 초창기부터 관계를 맺어 연세학원에서 인재를 배출한 스승의 사표였다.

1942년 8월부터 연희전문학교는 일제에 탈취되었다가 해방되던 1945년 11월 5일 혼란한 정황 속에서 부활되어 개학식을 갖고 12월 5일에는 정규 강의를 시작했다. 그 당시 영문과 교수로서 재직하던 김충선, 이호근, 윤태웅, 김상용, 한관숙, 이양하, 홍승국, 박보서 교수 등은 영어와 영문학 및 문학개론 등을 가르쳤고 그들을 통하여 영어교육과 영문학교육은 크게 신장되었다. 연희전문학교 교원 총 59명 중 8명이 영어 및 영문학 담당 전임 또는 겸임교수였다. 이 바탕 위에서 경성제대 출신인 김충선 교수가 1945년부터 1946년까지 과장직을 맡으면서 영문과를 정식으로 출범시키는 전초작업을 하고 있었다.

영문과가 정식으로 개설된 것은 새로운 교육법에 따라 1946년 8월 15일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면서부터다. 이후 경성제대에서 영문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최재서 교수가 1947년에 부임하여 과도기의 영문과를 전담하면서 영문학의 기초와 체계를 이룩하였다. 그는 정상적인 대학교 수준의 학정표를 작성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고 그 학정표에 따라 영어영문학 과목을 담당할 유능한 교수들을 확보하는 일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다른 대학들보다 앞서가는 전통 있는 영문과를 세우는 데 초석의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50년 초부터 한국의 초기 영문학계를 대표할 만한 다수의 영문학자들이 전임으로 채용되었다. 그 교수들을 임용 연대순으로 들면, 6·25 한국전쟁 이전으로 이혜구, 고병려 교수, 그 이후로 권명수, 이봉국, 오화섭, 배동호, 이군철, 유영 교수 등이다. 이와 같이 교수진이 강화되면서 영문과는 영국시, 영국소설, 영국희곡, 영국비평 등으로 세분하여 충실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1950년으로 되돌려, 이 해에 들어서서야 학교운영도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6·25 전쟁의 발발로 교수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9·28 수복과 함께 학교는 학생들의 재등록을 받고 다시 개강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교수로는 박술음, 최재서 두 분뿐이었다. 박술음 교수는 “영문법”을 가르쳤고 최재서 교수는 “영국문학사”를 가르쳤다.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고병려 교수는 이 당시 신과대학 교수로서 라틴어와 헬라어를 가르쳤고, 심인곤 교수와 김덕삼 교수는 모두 이공대학 교수로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홍승국 교수는 상과대학 교수로서 영어를 가르쳤다.

6·25 전쟁 때 북진하던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학교 본부는 대구로 피난하였고, 그 후 부산으로 옮겨 피난지에서 1953년 7월까지 임시로 학교운영을 계속하다가 그 해 8월에 서울로 다시 옮겨오게 되었다.

영문과가 개설되고 나서 3년이 지난 1949년 이후 시행된 교과과정에 따르면 영어학 분야로서 영어발음법, 영어학개론, 영어학사, 언어학개론 등이 개설된 것을 알 수 있다. 1946년 영문과가 창설될 당시 언어학계는 새로운 언어이론이 도입 소개조차 되지 않아서 매우 열악한 실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1949년 이후 교과과정에 명시된 영어학 과목을 가르칠 교수진을 확보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1953년에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언어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전형국 교수와 보스턴 대학교에서 역시 언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김선재 교수가 전임으로 채용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전형국 교수는 1950년대의 극히 불비한 상황에서 새 경향의 영어학 곧 “영어교수법”과 “구조주의 언어학” 및 “영어발달사” 등을 도입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그들을 깨우쳤고, 계속 연구와 강의를 통하여 영어학 연구의 맥을 튼튼히 하였다.

1954년에는 연희대 철학과 졸업 후 대학원에서 영어학을 전공하고 이후 프랑스에 유학하여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국가박사’ 학위(Doctorat d’Etat)를 취득한 최석규 교수(1954∼74 재직)가 전임으로 채용되어 “언어학 개론”을 통해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와 그의 제자 마르띠네(André Martinet)로 이어지는 유럽의 구조주의 언어이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고등영문법”을 가르치면서 Otto Jespersen을 접할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1956년 3월 미국 펜실바니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프레드 루코프(Fred Lukoff, 1956∼60 재직) 박사가 영문과 초빙교수로 부임하면서 영어교육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미국무부는 아시아의 이른바 개발도상국들에 개선된 영어교육을 위해 우수한 학자를 파견하고 있었는데, 루코프 박사는 한국의 연세대학교로 파견된 것이다. 학창시절 노엄 촘스키를 능가한다는 평을 스승(Zellig Harris)으로부터 들었다고도 전해지는 그가 한국, 특히 연세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가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처음 소개한 새로운 언어이론은 원래 문학도였던 송석중(작고), 김진우 같은 우수한 인재들을 매료시켜 언어학 분야로 전향케 하기도 했다. 또한 1957년부터 새로운 방법의 영어교육을 모색하던 전형국(1952∼81 재직) 교수와 함께 루코프 교수는 우리나라 대학영어 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하여 온 파일럿 프로젝트(Pilot Project, 1957), 표준영어계획(Model English Program, 1960), 현대영어계획(Modern English Program, 1962) 등등의 교육방법을 개척하였다. 이후 파일럿 프로젝트 등 현대영어 교육계획에 참여한 교수로는 이명근, 송석중, 최익환, 나건석, 이맹성, 유대식, 유의상, 유지식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유의상 교수는 여기서 특기할 만하다. 고등학교(경복고)만을 나와 영어 문장력에 있어 가위 독보적인 존재였던 그가 연세대 영문과에 자리를 잡은 것은 ‘열린 인사정책’의 성과라 할 만한 것이었다(정주 오산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신 바 있는 그의 부친 유영목 선생은 자신의 아들이 일제하에서 대학교에 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다).

이로부터 영문과는 학생들의 독해 청취 회화 작문의 능력을 균형 있게 함양하는 데에 구체적인 교육목표를 두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1958년 어학실습실(language laboratory)의 신설을 주선하고, 과거의 전통문법에 의한 강독 위주의 방법을 지양하여 영어교재를 독자적으로 편찬하기 시작했다. 어학실습실을 통하여 주당 한 시간씩 영어원어민이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가지고 영어 청취를 하였고, 교실에도 매 시간 녹음기를 가지고 들어가 녹음테이프를 틀어주고 듣고 따라 읽도록 하여 영어의 청취력과 발음교정을 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교과서의 체제나 교수 방법 또한 이에 준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본교 학생들에게는 물론 한국 영어교육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재래식 영어교육을 지양하고 정확한 발음교정과 억양훈련에 중점을 둔 교육을 실시하고, 나아가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등 이른바 ‘네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살아 있는 영어교육에 역점을 둔 연세대 영문과의 영어교육은 한국에서는 처음 실시된 것으로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64년 ‘교양학부’가 신설되면서 교양학부는 조신권, 심명호, 정명진, 김태성, 이덕형, 이홍훈, 조철현, 양영재 등을 영어전담 전임교수로 채용하여 영어교육을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서 어학실습실을 확대 개설하였고, 여러 차례 영어교재 개편을 통하여 교육의 내실화를 기하였으며, 1966년 1학기부터는 2학년생들에게도 어학실습을 활용하도록 하였다. 학생들의 독해력을 강조하는 한편 영어 작문과 회화 능력을 키워 주기 위한 외국인 어학 강사(전임대우)의 확보에 힘썼으며, 그 결과 원한광(H. H. Underwood), 서도륜(Dwight Strawn), 사로순(Lois J. Sauer) 등의 교수들이 속속 임용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절 교양학부 어학 주임은 김선재(1963∼65 재임), 나건석(1965∼70 재임), 유지식(1970∼71 재임), 조신권(1971∼74 재임), 이군철(1974∼76 재임) 교수 등이 역임하였다.

방금 말한 ‘교양학부 어학 주임’의 재임기간은 영문과 교수로서의 재임기간과 별개의 것이다(어학 주임은 나중에는 국어와 한문을 제외한 독어, 불어 및 영어만을 관장하는 외국어 주임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으며, 교양학부가 해체되고 영어영문학과가 영어를 관장하게 된 후로는 영어주임으로 개칭되었다. 이때의 영어주임은 학과장의 통제를 받는 실무책임자에 지나지 않았다). 영문과 교수로서의 재임기간으로 보자면 나건석 교수는 1960년부터 92년까지 재직했고, 유지식 교수는 1965년부터 77년까지 재직했으며, 조신권 교수의 재직기간은 1967년부터 2002년까지다. 나건석 교수는 학생들의 실용영어 능력 향상에 심혈을 기울였고, 1967년부터 주당 2시간의 영어시간을 1학년 교과과정 속에 넣도록 학교 당국과 협의하여 그의 구상을 성취하였다. 유지식 교수는 어학실습실 확충에 힘을 쏟았고, 교양학부 교수와 영문과 교수의 유대 강화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에 큰 몫을 감당했다. 조신권 교수는 유지식 교수가 시작했던 독본 교재 Readings in English for Freshmen을 완성하여 1학년 독본 교재로 사용하게 하는 한편, 1970년부터 연차적으로 College English Reading Series 12권을 연세대학교 출판부를 통하여 출판하였으며, ‘양서읽기 운동’을 선도하였다. 그 결과 교양학부와 영문과 전임교수들이 도합 12권을 추천하여 각자 한 권씩 책임을 지고 편주를 붙여 출판되었고, 이 총서는 교양학부가 해체될 때까지 양서 읽기용 교재로 사용되었다.1)

1976년 교양학부가 해체된 이후 학생 수의 양적 팽창에 따른 시설부족과 이에 대한 행정적 지원 미비 등으로 인해서 영어교육은 실질적으로 약화되었고 사회진출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시사영어나 회화반 같은 실용영어에 대한 요구가 더 강화되었다. 그래서 교양 선택과목으로 전교 규모의 실용영어 강좌를 많이 개설하게 되었다.

1972년까지는 12학점을 이수하던 영어시간이 1972년 12월 11일 대학교육개혁안이 발표되면서 140학점제와 부전공제를 채택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히 1973년부터는 9학점으로 축소되었고, 1989년 교양교육과정 개편 시안이 확정되면서 영어는 3학기 9학점에서 2학기 6학점으로 줄었다. ‘심리적 중압감’과 ‘학습부담’의 해소가 그 이유였다. 2004년부터는 6학점에서 4학점으로 다시 줄었다.

교재에 대해 좀더 언급하자면, 1962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동안 영어교육은 목표 설정의 변화에 따라 9차례 개편되었다. 현재는 영문과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교재 체계에서 벗어나 수입 교재를 사용하고 있는 바, 이 또한 변화된 교육목표의 설정에 따른 것이다.

끝으로 영문과 대학원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면, 1950년 6월에 30명을 모집하여 개설되었지만 전쟁으로 중지되었다가 1952년 4월 부산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 지원자 26명 중 13명을 합격시켰는데 그 중에 영문과 석사과정 1명(배동호)이 포함되어 있었다. 1955년 배동호 동문은 제1호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모교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2006년까지 50여 년간 46명의 교수와 강사들이 동원되어 대학원 교육을 실시해오고 있다.

대학원 교육은 학부 교육과는 달리 전문화된 인재들을 길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대학원의 영문과 석박사 과정이 개설되었던 1950, 60년대 초기에는 뚜렷한 전공과 학문적 훈련과 연마의 과정을 거친 교수들이 거의 없어서 전문화된 교육을 실현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1970,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거나 국내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대거 전임으로 채용되면서 대학원 교육도 전과는 달리 극대화되었고 크게 심화되었다. 그간 총 46여 명 교수들의 전문적인 학식과 탁월한 전문성을 통하여 학문적인 자극과 도전을 받은 학생들이 상당수 유학을 가거나 국내에서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여 학위를 받고 현재 전국 각 대학교에서 활발하게 교육과 학술활동을 하고 있다.


4장 잦은 학제개편과 영문과 상황


1. 5·16 군사정권의 대학정비


1960년 4월 혁명 이후 학원 민주화 운동의 바람은 연세대에도 불어 닥쳤으며, 그 결과 학교기구 및 학사운영에 대폭적인 개편이 있었다. 교육의 중점을 과학교육에 두고, 강의에만 의존하던 교육을 지양하여 학생들 사이에 자율적 과외활동과 대학생활을 유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침에 따라 교육내용과 교육방법 등 학사정책의 쇄신을 단행하려고 할 무렵인 이듬해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이 군사혁명은 대학에 또 다른 제도적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강력한 규제조치도 취하였다. 동년 9월 1일 5·16 권사정권은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공표하였다.

예컨대 교원의 60세 정년제를 규정하였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제와 아울러 대학졸업 예정자에 대하여 학사학위 국가고시를 시행하며, 교수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전임강사 이상의 대학 교수에게 매년 논문을 제출하게 하였다. 교수의 신규채용 시에는 논문을 제출하여 심사에 합격한 자만 채용하도록 하였다. 진급 또한 같은 방식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대학교육을 정상화한다는 취지하에 대대적인 대학정비를 단행했으며, 이에 따라 완전히 폐교·폐과의 조치를 당한 대학도 여럿 있었다.

대학정비를 통해 연세대학교에서 가장 타격을 입은 곳은 문과대학이었다. 대학교수의 정년을 종래의 65세에서 60세로 낮춘 결과, 고병간, 김명선, 김윤경, 정석해, 심인곤, 이용설, 나기호, 박태준 교수 등이 퇴임하게 되었으며, 영문과에서는 심인곤 교수가 이 경우에 해당했다.

5·16군사정권의 강압적인 대학 정비 시책에 따라 학제는 변경되었으나, 영문과의 경우 대학입학 자격시험과 졸업 예정자에 대한 학사학위 국가고시로 인해 입학이나 졸업에 불의의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논문 심사에 불합격해서 신규채용이 되지 못한 교수나 진급을 못한 교수도 없었다. 말하자면, 목하 제도가 다분히 ‘정책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영문과는 이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다만, 수준 높은 영어 강독과 밀턴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문학의 감동을 주던 심인곤 교수가 당시의 조치로 인해 ‘일찍’ 정년퇴직한 것은 영문과뿐 아니라 학교 전체의 손실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2. 교양학부 설치


대학생들의 교양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교양학부가 설치된 것은 1964년 3월이다. 교과목을 ‘교양과목’과 ‘전공과목’으로 분류한다는 교육법 시행령의 규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치였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박학(博學)의 기반 위에 전공학문을 쌓아 올려야 한다”는 교육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6년에는 교양학부에 한해서만 실시하던 영어실습을 2학년 전체에 일주일에 1시간씩 이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76년 10월 28일에 교양학부가 해체될 때까지 영어 12학점을 이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1970년 11월 26일 교무위원회는 교양과목 개편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국민윤리’ 과목을 개설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결과 “실험실습이 있는 과목은 과목당 실험실습 시간을 2시간 이상으로 할 수 없으며, 실험실습이 없는 과목은 원칙적으로 이수시간이 동일해야 한다”는 조항이 세워져, 이 때문에 영어교육 커리큘럼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의 교양학부 영어 전임교수들은 교양영어 12학점을 고수하느라 실로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으며, 결국은 “영어 학점 수를 줄이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인식과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었다.

1968년부터는 계절 수업제도가 도입되었는데, 이 제도는 학기 중의 학업부진 학생을 대상으로 방학 기간을 이용한 실력배양에 그 목적을 둔 것이었다. 1969년부터는 동계방학을 이용하여 대학생 일반의 교양을 향상시킨다는 취지로 영어원서를 책정하여 ‘양서 읽기 운동’을 실시하였다. 계절 수업은 처음에는 영어 한 과목에 대해서만 실시하다가 1970년도부터는 수학, 독일어 등을 포함하여 5과목으로 그 수가 늘어났다.

이 제도는 그 본래의 의도인 실력배양보다는 여름이나 겨울에 수강하는 대가로 학점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따라서 학점미달생들을 구제해 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냐는 부정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성과가 전적으로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고, 영문과의 입장에서는 석사 학위 소지자들과 박사과정 학생들을 다수 강사로 수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계절제 수업을 통한 경력과 경험을 토대로 타교 전임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교양학부는 10년간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6년에 해체되었다. 교양학부가 그 자체의 완전한 독립건물이 없었다는 것, 교양학부 소속의 교원 수가 부족했다는 것, ‘학과’와 ‘교양학부’가 이중 구조의 성격을 띠면서 역할분담이 불분명할 때가 많았다는 것, 이런 것들이 교양학부제 폐지의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좀 더 민감한 사안도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교양학부 교수가 각 학과 교수보다 실력과 품격이 떨어진다는 편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어 과목의 경우, 같은 영어를 가르치면서도 교양학부 교수들에게는 불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영문과의 전공과목을 가르칠 기회가 없었다. 영문과의 원로 내지 중진 교수들 또한 교양학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학과 소속의 교수가 동시에 교양학부에도 소속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으며, 따라서 교양학부의 원래 취지가 명색을 잃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여러 경로로 파악한 학교당국은 교육의 효율성을 확보하고 불합리성을 해소하기 위해 교양학부를 폐지한 것이다. ‘실험적’ 학제개편이 실패로 끝난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3. 입시제도의 변화


1946년에 연희대학교가 설립된 이후 입시제도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본 대학교는 가장 획기적인 입시제도라 할 수 있는 ‘특차 전형’의 방식을 취하였다. 다른 대학들이 입학시험을 실시하기 전 특차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제도였는데, 일부는 무시험으로 신입생을 선발하고 나머지는 필답시험으로 선발하였다. 무시험 대상은 전국 각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중 성적석차 100분의 5 이내에 들어가는 학생들로서, 이들은 어떤 학과에도 지원할 수 있었다. 남은 정원에 대해서는 필답고사를 실시하여 성적순으로 선발하였다. 이 시기에 영문과가 많은 우수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56년도 이후 연세대는 완전 무시험제도로 바뀌어 이 제도가 1960년까지 5년간 계속되었다. 1차로 서류전형을 실시하여 선발하고, 2차로 적성검사, 면접, 신체검사와 전년에 측정한 각 고교의 상관계수에 의해 선발하는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다. 연세대 영문과는 당시 교수진이나 교육시설 및 환경에 있어 정평이 나 있었고, 이 때문에 자연히 전년의 학교상관계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고등학교에서 신입생들이 영문과에 무시험으로 많이 지원하였다. 당시의 대입예정자들이 서울대학교나 고려대학교보다 연세대를 선호했다고 한다면 과장으로 들리겠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1960년 초에는 1956년도 이후부터 실시했던 무시험제도에 대한 발전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61년도에 본 대학교 입학시험은 고등학교 재학 당시의 성적평가로 제1차 전형을 하고, 제2차 전형은 필답고사와 적성검사로 실시함을 기본방침으로 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1962년과 1963년에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를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본 대학교에서는 국가고시 합격자에 한하여 필답고사에 응시하게 하고, 국가고시 성적에 체능점수를 합한 순위에 의해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다만 1962년에는 동계 진학자를 30% 무시험 전형했으나, 1963년에는 20% 선발한 것이 달랐다. 동계 진학자를 (제한적이지만) 우선 선발한 것은 사실상 동계 진학자가 아닌 다른 우수한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제도는 아니었다. 이 제도는 1963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는 단 2회의 실시로 그치고, 1964년부터는 폐지되었다. 이렇듯 졸속한 국가 입시정책의 변경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연세대의 1964년도 입시제도에 있어서 독특한 점은 종래의 각과 별로 뽑던 문과대학과 가정대학, 음악대학에 대해 ‘대단위선발제’를 채택한 것이었다. 각과별 커트라인을 책정하지 않고 성적순으로 일괄 선발하는 것으로, 단지 성적에 따라 전공학과를 선택하는 불합리를 극복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제도를 통하여 들어온 학생이라 할지라도 전공을 선택할 때는 결국 인기학과로 집중되기 때문에 실효는 거두지 못한 셈이다. 결국 대단위 선발제는 이듬해 폐지되고 과별 선발의 체제가 다시 채택되었으니, 이는 후자가 ‘정석’임을 알려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졸업생들의 사회진출 경향을 보면 교사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6·25 전쟁이 지나고 사회 건설의 역동성이 탄력을 받으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1950년대 말의 졸업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종은 그리 많지 않았고, 회사원이나 교사로 진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시작되면서 사회 진출의 폭도 넓어지게 되었다.

1971년도부터는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 및 전인교육을 지향한다는 취지에 입각하여 인문·사회계와 자연계에 속하는 전 과목을 출제 대상으로 하는 입시제도가 채택되어 1973년까지 계속되었다. 참고로(『무악논고』 제93집에 실린) 1972년도 연세대 입학성적 과별 영어 평균치 비교표를 보면 평균 70점대는 영문과, 경제과, 의예과, 정외과, 신방과 등 5개 학과다. 이로 보아서 입시제도가 어떻게 바뀌어도 영문과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지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입시제도 변경의 대목을 짚는다면, 1979년의 문과대학 및 이과대학의 계열별 모집, 1982년 학과별 모집으로의 복귀, 2000년의 대학단위별(인문, 사회, 이학, 공학, 의치예과, 예체능계열) 등이다. 2001년에는 대학단위에서 신학 계열과 생활과학 계열이 추가되었다. 대체적으로 2000년 이후에는 본교가 실시하는 논술고사와 면접 점수 및 수능시험2)과 내신성적을 종합해서 단위별로 신입생들을 모집하는 형식이다. 앞으로는 논술고사와 면접 점수 반영비율을 더 높여서 당락을 결정하겠다는 것이 학교 측 방침인 바, 사실 이른바 일류대학들은 대개 이런 입시 전형 방법을 취할 전망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대학은 대부분 수능시험과 내신 등 몇 가지 계량화된 요소를 가지고 성적순으로 학생들을 뽑을 뿐 적극적으로 인재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독자적으로 기울이기 힘들게 된 것이 현실이다. 다름 아닌 교육부 당국의 간섭 때문이다.


4. 학부제와 학부대학


1995년 학부제 논의가 진행되면서 동년 11월 ‘인문학부’가 설립되었다. 그 결과 바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명칭과 체제에 대한 문제였다. 문과대학이 단지 인문학부 하나로 이루어진 데에서 오는 문제 말이다. 1997년 3월에 이르러 이 문제가 외관상 해결되는 것같이 보였다. 종전의 11개 인문학부에서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노어노문학과 등 3개 학과가 통합적으로 독립되어 ‘유럽어문학부’로 개칭됨으로써 8개 학과로 구성된 인문학부와 구별되게 된 것이다. 문과대학은 이제 인문학부와 유럽어문학부라는 2개의 학부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명칭 내지 체제상으로는 구색을 맞추게 된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영어영문학과가 어째서 유럽어문학부가 아닌 인문학부 소속이어야 하는지의 문제 말이다. 원래 영문과에서는 학부제의 타당성에 관한 찬반 의견이 반반씩 엇갈렸었으나, 방금 말한 문제는 학부제에 대한 찬반 의견과는 별개로 제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유럽어문학부’라는 것이 신설된 이상 영문과도 당연히 여기에 속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영문과의 견해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해 학교 당국은 납득하기 힘든 유권해석을 내리고 있었다. 즉 독일어나 불어나 노어의 경우와 달리 영어는 영국 외에 미국과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모국어로 사용되는 언어이므로 ‘유럽’어문학부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해석법에 대하여 영문과는 또 하나의 견해를 표명했다. 즉, 그렇다면 아예 영문과를 ‘영어영문학부’로 독립시켜 줄 것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건의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새로운 학부의 신설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따르며 넓게 보아 학부제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항의도 거세게 있었지만 결국 영문과도 대세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문과를 유럽어문학부가 아닌 인문학부 소속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사실상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여기서 언급해 둘 만하다. 유럽어문학부 소속의 3개 학과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3개 학과 또한 영문과가 유럽어문학부에 포함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을 삼가려 하지만, 아무튼 이는 ‘비학문적’이라 할 수 있는 처사로, 엄격하게 말하자면 생존을 위해 합법성을 저버린 처사요, 심하게 말하자면 집단이기주의의 결과인 셈이다. 여기서부터 학부제의 이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돌이켜보건대 학부제를 실시한 결과 얻은 것이 무엇인가.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학과 간의 생존경쟁만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고, 특성화를 통해 대학을 다원화하겠다는 대학 경쟁력 강화 정책은 인기학과 위주의 대학 경쟁을 부추겼을 뿐이다. 대학의 근간이 소수의 인기학과 위주로 재편되는 구조 조정은 결코 진정한 개혁이라 할 수 없다. 시장의 경쟁 논리가 학풍의 획일화로 연결되는 부정적인 현상이 학부제 신설 이후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적어도 문과대학 내부를 들여다 볼 때 말이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곤란에 처했다. 어느 학과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학과 교수들의 세심한 지도도 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소속감의 결여는 동아리 모임의 이점도 무산시켰다. 이중전공을 한다고 하나 이수학점이 36학점으로 너무 축소되어 학구적인 성과도 현저히 저하되는 것 같았으며, 현실적인 면에서도 이중전공의 실효성을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튼 학부제는 그 체제의 운영과 목표 수행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최근 들어 전공분야별 입학생을 일정 비율 허용하고 또 전공분야 이수학점 수도 늘여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지만, 실은 이러한 최근의 경향이야말로 결국 학부제 자체의 교육적 비효율성 내지 비합리성의 현실적 표상이라는 성찰이 아쉽다).

학부제의 실패를 극복할 대안으로 고안된 것이 1999년 9월 1일 설립된 ‘학부대학’이다. 신입생들은 학부대학에 속하여 학사지도교수의 도움으로 대학생활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학부대학에 속한 2, 3학기 동안 다양한 전공을 탐색하여 이후 전공결정과 함께 각 전공이 소속된 단과대학으로 소속을 옮기는 제도인 것이다.

학부대학은 폭넓은 교양에 바탕을 두고 전문지식을 쌓는 인재를 키워내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 각개 대학의 가장 중요한 과목들을 선정하여 모든 학생들이 공통으로 이수하도록 함으로써 ‘핵심교육’을 달성코자 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학부대학의 교양 교과목들은 학부기초과목, 학부필수과목, 계열기초과목, 학부선택과목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그 교육 내용도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연세대의 자체 조사에 따르면, 2004년 1학기 신입생들의 과목별 공부시간은 1주일에 2.4시간, 6과목을 들으면 1주일에 공부하는 시간은 14.4시간으로 하루 평균 2시간 꼴이다. 선진국 대학의 6∼8시간에 비하면 30% 수준이다. 이에 학부대학은 2003년부터 ‘신입생 2배 이상 공부시키기’ 캠페인에 나섰다. 교과과정을 개편해 글쓰기 시간을 늘리고, 퀴즈 시험도 늘려 면학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결과 2004년 2학기 연세대생들의 과목당 공부 시간은 수치상 3시간으로 올랐다. 그러나 이는 아직 선진국 대학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에 학부대학은 1학년생을 대상으로 ‘명저 읽기’ 커리큘럼을 만들어 적어도 30권의 명저를 읽도록 유도하고, 작문과 토론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의사소통 능력을 끌어올릴 계획이며, 영어와 제2외국어에 있어서도 말하기와 쓰기 수업을 신설하고 있다.

학부대학 제도가 나름대로 목적을 분명히 설정하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가 앞서 말한 ‘학부제 이전’의 제도에 비해 내면적으로 얼마나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느냐에 대한 평가는 아직 하기 이르다. 하지만 1964년에 설립되었다가 10년 만에 폐지된 ‘교양학부’ 제도와 흡사한 것이 학부대학 제도라는 점을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