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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속으로 - 한국 교육의 산실, 여성 교육의 선구자였던 모교 (49 박정숙) (2008.04.06)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한국 교육의 산실, 여성 교육의 선구자였던 모교


49 박정숙




2005년 5월은 연세대학교가 창립 120주년을 맞이한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달이다.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가 연대에 입학했던 해가 1949년이니, 벌써 50년하고도 6년이 더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나이 먹은 모든 사람이 비슷하게 느끼듯, 학창생활에 대한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모교에 대한 추억은 당연히 등굣길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된다. 정문도 울타리도 없던 자연 그대로의 입구를 들어서면 길 양쪽에 늘어선 백양나무가 우리를 맞아주었고, 맑은 공기는 코끝을 더없이 상쾌하게 해주었다. 찬란한 태양빛이 백양나무를 비출 때면 초록과 은색으로 변한 잎들이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와 환상적으로 어우러졌다. 우리들의 하루는 평화와 행복 그 자체였다.


해방 직후 나는 이화여고에 재학 중이었다. 우리 학년부터 6년제가 시행되었기에 우리의 애교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과도기여서 4년을 마치고 전문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신봉조 교장께 여의전(女醫專)으로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학교에 남아 학교 명예를 드높이고 대학으로 진학하라고 권하셨던 것이다. 나는 의전으로 진학하려던 꿈과 희망을 접고 말았다. 당시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농구부 주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데다가 육상대회가 있을 때마다 김혁진 육상코치께서 육상대회에 나가줄 것을 부탁하셨기에, 난 농구부원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운동장에서 60m, 100m 허들 및 릴레이를 뛰었던 것이다. 연중 운동을 해야 했기에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으면 코가 땅에 닿도록 졸기 일쑤였다.


몇 년간 농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우승도 여러 번 하였기에 나의 인기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 1년을 앞두고 난 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망하던 목표가 영문학 교수가 된 후 많은 번역서를 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하여 여성 외교관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펼쳐보고 싶기도 했다. 화가가 되는 것 역시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꿈이었다. 여고시절 미술선생님이셨던 이인성 화백은 대구에서 천재화가로 불리셨던 대단히 유명한 분이셨다.


연대로의 진학은 우연히 결정되었다. 고등학교 운동장에는 어느 독지가가 기증한 무려 12개의 백보드가 늘어서 있었고, 농구대가 많은 탓인지 연희전문 선수들이 자주 연습하러 오곤 했다. 선수들이 우리와 같이 연습도 자주 했기에 난 자연스레 연세대로 진학할 마음을 굳혔다. 과를 선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영어를 못하면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난 영문과를 택했다. 여학생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15명이 합격했다. 영문과에 4명, 국문과에 2명, 사학과에 2명, 정외과에 3명, 신학과에 1명, 세브란스에 1명, 물리과에 1명 등이었다. 입학식은 6월에 있었는데, 영문과, 국문과, 사학과는 ‘A클래스’로, 정치외교학과, 철학과, 신학과를 합한 반은 ‘B클래스’로 나뉘었다. 생전 처음 남학생들과 한 반에서 수업을 하게 되자 이상하고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녀공학이 시작되었으나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모든 불편을 감수하던 중 백낙준 총장께서 지금의 대학원 건물 뒤에 화장실이 딸린 방 하나를 여학생 쉼터로 배정해주셔서 우리는 거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여자 선배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였던 호기수 씨가 연대에 재학 중일 때 짓궂은 남학생이 그녀 도시락에 개구리를 몰래 넣어 그녀를 놀라게 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질까봐 우리는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 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입학식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대문에 있는 자연장(紫煙莊. 지금 강북삼성의료원 자리)에서 영문과 신입생 환영회가 있으니 모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친구 박화양과 함께 나갔더니 당시 학과장을 맡고 계시던 박술음 교수님 이하 여러 교수님과 선배님들이 이미 배석해 계셨다. 연극인으로 이름을 날린 차범석 선배님 모습도 보였다. 차범석 선배님께서는 양면 갱지에 무슨 글을 한참 쓰시더니 느닷없이 종이를 내미셨다. 내가 어머니 역을, 박화양이 딸 역을 맡아 종이에 적은 대사대로 즉흥 연극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우리는 못한다고 우기다가 끝내 연기를 하게 되었다. 연기를 잘했는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시험을 치를 때였다. 차범석 선배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원한경 박사님 도미(渡美) 기념으로 연극 공연을 올리려 하니 배역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시험 때문에 안 된다고 완강히 반대하다가 이번에도 또 지고 말았다. 원 박사님 환송식 때 무대에 올릴 작품은 『르리유의 유언』이었고, 작가는 프랑스의 마르탱 뒤 가르(Martin du Gard)였다. 나는 하녀 역할을 맡았다. 코믹한 내용으로 기억되지만 스토리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자 관중석이 새까맣게 보였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고 박수소리가 요란하자 내가 마침내 해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나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은 자신감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우리가 받은 교육은 한국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국어를 가르치신 김윤경 선생님은 1분 1초도 어긋남이 없으셨다, 한 해 후배였던 국문과 김순임의 아버님이시기도 했던 김 교수님에게는 ‘스탠더드 워치’라는 별명이 붙었고, 인격자이셨던 그분을 우리 모두가 존경하게 되었다. 우리말 교육의 큰 스승이셨던 김 선생님은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기도 했다. 불어는 정석해 교수님, 영어는 박술음·최재서·김선기 교수님, 동양사는 민영기 교수님이 담당하셨다. 또 영어 회화는 프로보스트 교수가, 종교는 박상래 교목이, 교육학은 미국에서 막 돌아온 임한영 교수께서 담당하셨다. 음악 담당이셨던 박태준 교수님께서는 남녀혼성합창단을 조직하신 후 우리에게 할렐루야를 연습시키셨다. 팔을 위 아래로 흔들면서 지휘하시는 박 교수님 모습은 참으로 독특하고도 재미있었다. 이 모든 교수님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반면 학교를 향하는 길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동대문에서 수십 미터 늘어선 줄을 기다려서 힘겹게 전차를 탄 후 서대문에서 내려 걷거나 버스를 타고 학교로 왔다. 걸을 경우 북아현동 고개를 넘어 이대 앞을 지나 학교에 도달하면 온몸이 땀으로 젖곤 했다. 거의 뛰다시피 학교를 다녔기에 나에게는 ‘오토바이’란 별명이 붙었다. 버스를 탈 경우에는 서대문에서 트럭을 개조하여 만든 버스를 탔다. 차량은 죄수 수송차량 모습에 흡사했다. 그러면서도 찬란한 미래에 대해 꿈꿀 수 있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은 문학도들의 꿈이 무르익는 시절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사학과에 다니던 황연자, 정외과의 이원익, 박태용 씨와 만나 잔디밭에서 즐겨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원익은 시를, 박태용은 소설을 쓰고 있었다. 황연자는 문학소녀 티를 내면서 원고지를 갖고 다니며 글을 써댔다. 세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일찍 떠나버렸다. 왜 그리도 빨리 떠나야만 했는지…


2학년이 된 1950년 5월 10일경 학교는 연희전문에서 연희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처음 졸업생을 냈다. 하지만 희망에 부풀어 학교에 다니던 중 느닷없이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김일성이 북쪽에서 밀고 내려와 남한은 쑥대밭이 되었고, 우리들의 소박한 꿈과 포부는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날이 갈수록 전쟁은 잔혹해졌다. 서울을 포함한 남한 전역은 폐허로 변했고, 거리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어느 날 한 여자 선배가 찾아와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권유하면 다음날에는 다른 사람이 찾아와 민청에 가입하라고 요구하는 식으로 상황도 혼란스러웠다. 학교에는 다시 가볼 수조차 없었다. 더구나 피난을 못 갔던 나는 서울에서 어른 같이 차리고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 버티다가 1·4후퇴 때 가족과 함께 간신히 부산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1951년 10월이 되자 부산 영도의 산 위에 가교사(假校舍)와 텐트를 교실로 삼은 임시변통의 연희대학교가 문을 열었다. 눈물 나는 피난살이에 매사 부족한 것들 천지였다. 교수님들도 뿔뿔이 흩어졌기에 부산으로 오실 수 있었던 교수들만 모시고 수업을 받게 되었으니 제대로 된 대학이라 할 수 없었다. 영문과에는 오화섭 교수님과 권명수 교수님만 계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나는 오화섭 교수님의 멋들어진 영시낭독법과 희곡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입학 때 기대했던 다채로운 영문학 강의들은 맛볼 수 없었다. 유일한 낙은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와 수평선 너머로 내려가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임시교사 아래 바닷가로 내려가 막 물질을 끝낸 해녀가 가져온 멍게나 해삼을 사 먹곤 했다. 1953년 2월 23일 졸업식을 맞이했을 때 여학생은 나하고 국문과의 홍장기 단 두 명뿐이었다. 초라하고 서글픈 졸업식이었다.


나는 졸업 후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UNKRA(UN 한국재건단)에 취직이 되어, 에블렌 맥큔(Evelen McCune)이란 미국 부인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내가 연희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가 자청해서 자기랑 일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분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3·1만세도 덕수궁 앞에서 지켜보셨다고 했다. 그녀 부친은 선교사로 맥큔 박사란 분이셨는데, 초창기 연희전문 교수를 역임하셨다고 했다. 두 분은 한국과 연대를 대단히 사랑하시던 분들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즐거운 일도 있었다. 오화섭 교수님과 몇 분들이 모여 연극 모임을 만드신다고 연락을 해주셨다. UNKRA에 근무하는 직원 몇 사람을 포함하여 연대, 이대, 서울대, 동국대 출신들과 함께 테아트르 리브르(Theatre Libre)라는 단체가 탄생했다. 우리는 퇴근 후에 모여 열심히 연습한 후 마침내 부산 동아대에서 제법 그럴 듯한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피난지에서였기는 했지만 이 공연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멋진 경험 중 하나였다. 1953년 서울로 환도한 후에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서대문에 있던 동양극장에서 공연키로 극단이 기획을 세웠고 오화섭 교수께서 날보고 어머니 역을 맡으라고 종용하셨으나, 아는 사람들이 많던 서울에서는 절대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나는 끝내 고사하였다. 대신 임택근 씨와 이대 출신 이순자 씨가 배역을 맡게 되었다.


환도해서도 꾸준히 UNKRA에 다니던 중 맥큔 여사가 본국으로 귀국을 하시게 되자 내 문제를 걱정하시면서 날보고 아세아재단(Asia Foundation)에 지원하라고 권하셨다. 이 기관은 아시아 27개국에 진출해 있으면서 전후 폐허가 된 나라의 문화 복구를 돕던 미국 기관이었다. 30대 1의 경쟁을 뚫고 나는 다행히 이 기관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 후 둘째 아이를 낳게 되어 직장생활을 그만 두었다가, 41세 나이에 평소 가고 싶어 하던 한국걸스카우트 연맹에 다시 취직하였다.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희생 봉사 정신을 실천하는 이 교육단체는 나의 평소 신조에 전적으로 부합했다. 피난시절부터 꼭 원하는 곳에 취직된 것을 난 지금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그 후 걸스카우트 사무총장, 이사 및 명예이사, 한국어머니농구회의 회장과 고문, 한국여자프로농구연맹 상벌위원 등 내가 거친 사회활동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연대에서 배운 지식과 교양, 사회와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양립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4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수없이 역경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가호 아래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감사하기만 하다.


취업난이 극심한 요즈음 모습을 보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내가 그 옛날 남녀공학을 선택할 때에도 졸업 후를 염두에 두고 지원했던 기억이 있다. 내년이면 우리 학교도 남녀공학을 시작한 지 60년을 맞는다. 현재 여학생 숫자는 전체 정원의 40%에 육박한다고 들었다. 이에 반해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돕기 위한 지원책이 잘 구비되어 있는지 염려스럽다. 학교에서는 현상을 직시하고 사회 변화에 걸맞게 양성 평등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녀공학을 최초로 시작한 연대이니만큼 앞장서서 교육제도와 정책을 이끌어나가기 바란다. 여성 동문 숫자도 5만 명이 넘었다고 하고, 여성 동문들의 활동도 점점 성숙해지고 활발해지고 있으니 더없이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많은 고급 여성인력들이 사장되고 있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늘어난 여성 국회의원들 숫자만 봐도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절감하는 요즈음이다. 우리가 들어선 21세기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더 요구되며, 따라서 창의성과 탁월한 전문성을 갖춘 여성 지도자가 더 많이 배출되어야 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여학생처에서는 여성인력개발연구원을 발족시켰다고 한다. 이 기관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한 후 향후 사회로 나가는 여학생들로 하여금 전문성과 도전정신을 갖추게 했으면 좋겠다.


120년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연세대학이여, 세계 속에서 빛을 발하고 미래를 열어가는 대학이 되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영원하라, 연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