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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속으로 - 연, 이 아리랑 고개 (49 변성엽) (2008.04.06)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연·이 아리랑 고개

49 변성엽


학창시절에 있었던 몇 가지 추억을 적어볼까 한다.

그 전에 먼저 나에게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이 왜 영문과냐 하고 묻는 동창들이 많아 해명을 하고자 한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경향신문사와 서울음대에서 주최하는 음악 콩쿨에 출연하여 성악부문에서 일등으로 당선되어 서울음대에선 특례입학의 유혹이 있었으나 더 나은 선진국에 가서 성악공부를 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여 영문과를 택하여 영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영문과를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6·25가 터졌고 유학의 꿈은 깨지고 만 것이다.

1. 우리가 학교 다닐 무렵에는 가고 오는 길이 세 개가 있었다. 이대 교정을 지나 학교로 오는 길과 연대 정문까지 오는 버스, 그리고 기차를 이용하는 길이었다. 연대에서 이대 쪽으로 가려면 언덕으로 올라가야 되고 정상에서 연대와 이대 구역이 갈라지는 곳이 있다. 버스 타러 연대 정문 쪽으로 오는 이대학생과 버스를 기권하고 이대 쪽으로 가는 연대생이 로맨틱하게 만나는 곳이 연·이 아리랑고개이다.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미스 김이 지나가지나 않는지 정상에서 약간 머뭇거리다가 보이지 않으면 버스 타러 아리랑고개를 올라오는 이대생들에게 오늘은 버스가 고장 나서 안 다니니 돌아가라고 일러주어 골탕을 먹이는 일이 자주 있었고, 순진한 학생은 속아 넘어갔다.

짓궂은 연대생 가운데는 본관을 지나면서 수업하고 있는 교실을 향해 “영숙아, 복순아, 옥희야 등 이름을 불러 수업을 혼돈스럽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이대 학생과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직원들이 나와서 연대생들의 출입을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그 많은 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연대 쪽으로 임시 화장실을 지었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연대 남학생들이 이곳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용 도중 수업 끝나는 종소리가 나면 몰려오는 여학생들과 옥신각신 승강이를 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2. 버스를 타는 일도 매력만점. 등교 때나 하교 때는 으레 대대만원을 이루어 남녀 간의 접촉이 청춘남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여차장의 “오-라잇”은 일품이었고 빨리 안가면 우리가 대신 “오-라잇”을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3. 기차를 이용해서 학교 가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면 연대 임시역까지 굴이 두 개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굴 속에 들어가면 전깃불이 없어 잠시 동안 암흑이 감도는 동안 천지개벽이 일어나곤 했다. 간단히 예를 들면 캄캄한 굴을 지날 때 앞에 앉은 여학생과 키스할 테니 두고 보라고 얼굴을 돌려 우리에게 장담을 해서 그 결과를 기대했으나 뺨을 치며 호통 치는 할아버지 목소리에 모두들 웃음꽃이 피었던 일, 실은 굴에 들어가기 전에 할아버지가 올라와 자리를 양보한 것인데 얼굴을 안 보이려고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리다 자리를 바꾼 것을 몰랐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굴 속에서 책가방을 닥치는 대로 날려 보내 신촌역에서 (언덕 임시역) 책가방을 찾는 광경은 전쟁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많지만 한두 가지만 더 쓰고 마치려고 한다. 라콤파르시타(백총장님의 별명)께서 담배 피우는 학생들을 잡으려고 운동장을 헤매고 다녀도 날쌘 젊은이들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특별히 총장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 언제든지 만나서 인사드리면 웃음으로 대해주시고 말을 건네 주셨다. 인자하신 분이었다.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또 오화섭 교수님과는 사제지간보다도 형제지간처럼 지내면서 관계를 돈독히 하여 어리광도 부리곤 했다. 성경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하도 떠들어 “이 독사의 무리들아 조용히 못해” 하던 말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의 학창시절은 지금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낭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