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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속으로 - 개인사 (49 유병린) (2008.04.06)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개인사


49 유병린




나의 개인사를 소개한다면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겪었던 일들 중 어렵고 힘들었던 고생들을 극복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여 큰 보람을 느꼈던 일들을 회고하게 된다. 나는 30여 년 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참으로 깊은 좌절감을 맛보았지만 가정과 미래를 위해 삶의 길을 개척해 나가려고 노력해왔다.


유난히 부정의 유혹이 많은 직장에서 힘겹고 때론 부끄러웠던 삶을 회상해 본다. 나는 지난 젊은 시절부터 자칭 밝고 맑은 삶을 위한 뜻의 병진(炳進)이란 어릴 때 이름으로 나를 부르기를 좋아했다. 나의 청년 시기는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하여, 부모형제들과 헤어져 단신으로 대구, 부산으로 피난간 나는 미군부대, 고아원, 자취방 등을 전전하면서도 학업을 계속했다. 1953년 3월 연희대학교 부산 영도 분교에서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연대 대학원과 대구 장로교 총회신학교 본과와 공군사관학교 교관을 모두 선택할 수 있었다.


목사님이었던 큰 형님 충고에 따라 소명감 없이 안이한 생각으로 신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여 결국 연대 대학원으로 진학하기를 결정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부산역 큰길에서 당시 보건사회부 사회과장을 만나게 되어 부산 대신동에 있는 애린원이란 고아원 선생으로 일하게 되어 학교 다니기에 편리한 점을 생각해서 대학원 진학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당시 대학원장 김윤경 교수님의 엄격한 학사운영방침에 따라 한미합동견제위원회에서 근무하게 된 나는 강의를 빠짐없이 들을 수 없게 되어 일 년을 마치기도 전에 휴학을 하게 되었다. 공직에 있으면서 공부를 안 하면 퇴보하게 된다는 생각을 늘 간직하면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73년 2월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비롯하여 경영대학원(1976), 한국기독교선교단체 협의회 국제선교대학원(1989), 기독교 아세아 연구원(1993), 연세대 연합신학원(1996)을 거쳐 한일장신대학교 동남아 신학대학원(1999)에서 김용복 총장님의 지도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논문심사 교수님(7명)들의 권유로 『한국기독교 경제윤리의 모색』이란 책을 만들어 1999년 6월 10일 나의 70세 고희기념 축하예배 때 출판기념회를 개최하게 되었으며 다음해에는 흥사단 강당에서 한국 생명학 연구원 창설 기념일에 맞추어 『생명을 위한 경제윤리』라는 책의 개정판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나의 대학 전공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나의 고향인 청주에서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국선교사 Mrs. Miller와 원한경 박사의 아들 원요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Mrs. Miller 사무실에서 영어성경공부를 하였다. 연희대학교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입학금을 도와주면서 나를 격려해주었다. 우선 영어를 잘해서 외국어 유학을 해서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신학과를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선교사들의 생각인 것 같았다.


또 한 가지는 어머님이 나를 임신하셨을 때 중병으로 위급하게 되어 일본으로 유학 간 큰 형님에게 귀국하라는 전보를 세 번이나 보냈다고 한다. 큰 형님은 책을 팔아서 여비를 만들어 귀국하여 보니 어머니를 간호해주고 있는 교회 다니는 이웃 아주머님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어 우리 형님은 평양신학교와 한국 신학대학을 나와 목사님이 되어 큰 형님의 아들 셋이 목사가 되었고 셋째 아들은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우리 가족 중에 목회자가 15명이나 탄생하였다. 직장에 다니면서 나도 언젠가 신학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87년도부터 기독교 아세아 연구원에서 김용복 박사의 지도를 받아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제 나의 직장 경력 중 잊지 못할 일들을 요약해보기로 한다. 대학원을 휴학한 후 나는 1954년부터 경제기획원 전신이었던 기획처와 부흥부를 거쳐 경제기획원 초창기인 1961년 자립경제를 위한 기반 구축을 목표로 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작성한 18명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3차 산업분야인 교통 운수 서비스 부문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1962년 6월에는 국무총리 직속 울산개발계획본부에 파견되어 1년간 본부 기획 조사국에서 울산지역에 대한 공업센터 설치를 위한 경제적 기술적 타당성 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일은 종합제철공장을 사전에 필요한 조사도 없이 건설부에서 서무계장이 현금보따리를 배낭처럼 등에 업고 울산에 와서 대통령 참석 하에 성급하게 기공식부터 개최하여 이미 시작한 울산 항구의 방파제 건설이 허사가 되어 8천여 만 원의 예산만 낭비한 일이었다. 경제개발이란 구호 뒤에 감추어진 무질서와 시행착오로 예산의 낭비도 심했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외국의 기술용역회사의 타당성 조사에 따라 포항에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나는 경제기획원에서 10년간(1953∼1963) 근무하는 동안 1956년 ICA자금으로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원과 뉴욕대학원 콜롬비아대학에서 1년간 경제계획 과정을 이수하여 귀국 후 서기관까지 승진하였으나 정부기구개편으로 뜻밖에도 재무부로 전출되어 본부에 자리가 없어서 외부의 일선기관장, 교육원교관, 기획관리실, 기술연구소 등을 역임하는 동안 30대 초반에 얻은 직위를 그대로 20여 년간 유지하여 창피하게도 최고 고참이 되었으며 4차에 걸친 공무원 숙정에서도 무사통과하여 1987년에 명예퇴직하고 말았다.


1964년부터 인사이동으로 일선 기관장이 되고 보니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상하 간의 차별의식과 허례허식이 심하여 여간 어색하고 거슬릴 수가 없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벽에 붙여 놓은 각종 포스터를 제거하고 화장실 수리 등 청사 안팎을 대대적으로 정리정돈 하도록 하였다. 실천되지도 않는 각종구호를 곳곳에 붙여놓고 있는 것이 관료사회의 허위의식과 비능률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앙부처에서 습득한 경험과 소신에 따라 소송으로 15년간 끌어 왔던 국유재산 온양온천 탕정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 7명을 기관장 재량으로 해고 조치하고 황폐화된 시설을 수리 복구하기 위하여 시급한 행정조치가 필요하다는 보고와 수리비 50만원의 예산도 지원해 줄 것을 재무부 장관께 요청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방치해둔 재무부와 지방 감독관청의 관리직 책임자 4명을 직위해제한 일은 나의 소신에 의한 엄정한 행정조치의 결과였다.


공무원으로서 나는 관료주의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그 지역 사업가들과 교분을 쌓는 일보다 평범한 지인들과 조촐한 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서울에 와서도 고급요정이나 고급 레스토랑보다 빈대떡집이나 맥주홀을 선호했던 것은 관료주의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인 셈이었다. 각종 인사 청탁이나 향응 등을 일절 거절하고 일선기관장으로 몇 군데 다니면서 나는 주로 성당의 신부님, 의사들, 교회 목사님들과 친하게 지낸 셈이다.


당시에는 상부기관이나 감사원 감사 때의 비용을 하부기관에서 부담하게 되어 부정은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알게 되어 불가피한 점심대접을 대중식당으로 한정했고 차비는 기차표만 사주기로 했더니 사소한 일까지 문책하라는 감사결과 보고서를 보고 아연실색하였으며 거의가 주의 처분이나 무혐의로 처리되고 말았다. 지방에 있을 때에 가끔 주말에 서울에 오게 되면 형님에게 가서 차비와 용돈을 얻어 썼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1978년에 서울시내 일선기관에서 청렴한 직원을 발견하여 국세청에서는 전무후무한 대통령으로부터 청백리상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해주고 지원도 해주었다. 상을 받은 그 직원은 검소한 옷차림으로 동대문 밖에서 을지로 입구 사무실까지 도보로 출퇴근을 하였으며 점심은 도시락을 만들어 지참했고 본인 월급만이 총수입이었고 부인은 흰 봉투를 만들어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 썼다. 5개의 관계사정기관에서 철저한 사실 확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모두가 적격자로 추천해주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자여서 반가운 나머지 점심대접을 하려고 했으나 도시락을 먹는다고 번번이 거절당하여 너무하다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1965년 천안에는 10년간이나 한직인 총무과 행정과 징수업무만을 담당했던 계수에 밝은 이의성 주사가 징수계장이었다. 세무관서의 총무과는 인사계를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음지인 셈이었다. 이 계장의 딸이 여고 2년생이었는데 폐결핵으로 입원을 해야 된다고 하기에 나는 충남도립병원장을 찾아가 무료치료를 받도록 주선해주었다. 2개월간 입원치료를 받고 완쾌되었다. 나는 그를 모범 공무원으로 국무총리상 대상 후보자로 추천해주었으며, 때마침 과장자리가 공석이 생겼는데 상부관청은 물론 지역출신 국회의원 등 청탁이 줄을 이었지만 나의 고집대로 기어이 과장으로 임명했던 일은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1968년부터 나는 본청 기획관리실에서 2년 반 동안 열심히 일했으나 섭섭하게도 승진에서 빠져 대구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대구에서 명절에 양로원과 나병환자촌을 찾아 다녔다. 우연히 찾아간 양로원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이어서 대구 주교님을 만나게 되었다. 일선에서 책 한 권도 쉽게 가까이 하지 못하였던 나의 생활을 되돌아보고 반성한 것은 대구제일교회 이 목사님과 천주교 대구 주교님의 서재에서였다.


1973년 국세청 공무원교육원 교학과장으로 2년간 근무할 때 관세청과 국세청 직원들을 위한 교양강좌를 실시하여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 교양강좌에 대학교수, 신문사 논설위원, 신부님, 목사님, 수녀님들을 강사로 초빙하여 정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74년에는 일 년 동안 정초 공휴일(1, 2, 3) 외에는 일 년 내내 일요일에도 시험문제관리를 위하여 오전 중 근무를 하였다. 장단기 각종 교육과정에서 일 년 동안 총 6,800여 명을 집중적인 교육훈련을 실시하여 성적이 0.1%만 부족해도 사정없이 낙제시켜 재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나는 공무원 교육에 공로가 지대함을 인정받아 특이한 녹조근정훈장을 받게 된 것을 지금까지도 큰 자랑으로 생각한다.


1970∼80년대 일선기관에서 대우(주)와 현대자동차(주) 등 대기업에서의 청탁과 감사원과 정보기관 등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큰 보람을 느꼈다. 그 중에서 인천에 있는 선인학원 이사장이었던 백인엽 장군은 학교청사를 건립하는 데 2년 동안 야영생활을 하면서 직접 건축공사를 감독했었다.


위에서 몇 가지 지난 일들을 소개한 대로 나는 공직생활을 인내와 소신에 따라 고생을 무릅쓰고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청렴한 신앙인으로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가정경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방심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1993년 광명에서 전국 최다득점으로 큰딸이 시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는 전적으로 친구, 후배, 구로직업청소년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 덕택으로 주공아파트 집을 선거사무실로 사용하여 돈 안들이고 깨끗한 모범적인 선거를 통하여 당선된 것을 정말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17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아버지로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1991년 집사람이 심장을 수술하게 되었을 때 수술비용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알고 형님이 병원에 찾아와서 천만 원을 도와주시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속수무책으로 살았니!”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격려하여 주셨던 돌아가신 형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토록 나는 정말 준비 없이 멍청하게 살아온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공직에 있을 때에도 사회봉사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78년부터 5년간 명동 일은학교에서 중고등학교에 못 다닌 직업청소년들을 매주 1∼2회 일반사회와 영어교사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불우한 청소년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의에 큰 감동을 받았다.


공직을 떠난 후에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에서 운영위원과 자문위원으로서 경제정의를 위한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하였다. 어느 언론사의 간부가 양심고백을 통하여 언론사의 광고비 부정을 폭로하였다. 그는 언론사에서 해고되었으나 경실련에서 직원으로 일하도록 했으며, 어느 대통령의 아들이 인사에 개입한 증거를 어느 병원원장의 녹음테이프를 공개함으로써 처벌을 받게 되는 경우를 보고 경실련의 역할이 사회정의를 위하여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9년 가을 세계적으로 알려진 민중신학자인 전 한일장신대학교 총장 김용복 박사님의 권유로 나는 경제부처에서의 오랜 경험을 토대로 경제와 기독교신앙 문제를 연구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1990년 초부터 나는 기독교신앙과 경제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기독교생활(생명)경제연구소를 설치하여 부족하지만 현재까지 꾸준한 연구 활동을 해왔다.


앞으로 김용복 박사님이 운영하고 있는 한국생명학연구원의 지원과 연대하여 온 세계에 생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이때에 생명을 존중하는 시민운동과 교회 봉사활동 그리고 세계종교단체의 세미나 등에 적극 참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