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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속으로 - 동기동창이 그리워 (50 김영일) (2008.04.17)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동기동창이 그리워


50 김영일




나는 1950년 연희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지만 1957년 가을 학기에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같은 대학이지만 명칭이 바뀌어져 있었다. 내가 글머리에 ‘동기동창이 그리워’라고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현재 연락되는 동기동창이 한 사람도 없는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2004년도에 발간된 연세 동연록에 기재된 것을 보면 1950년도에 영문과에 입학한 학생의 명단이 18명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연락이 단절된 상태에 있다. 동기동창이 한 사람도 없는 졸업생, 그 얼마나 외롭고, 구슬프고,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렇게 된 연유를 나는 지금 잠깐 회상해 보려고 한다.


내가 입학을 하던 1950년도의 연희대학교는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대학이었다. 그해에 연희대학교는 특차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했다. 많은 학생이 응시를 했다. 경쟁률도 높았다. 나는 얼마나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영문과에 지원을 했던가! 3:1 정도의 경쟁에서 나는 무난히 합격이 되었다. 개강은 6월 5일 월요일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 6월 25일, 일요일에 6·25전쟁이 폭발한 것이다. 북의 남침이었다. 그러니 나는 3주간 신입생 생활을 하고 전쟁을 맞게 된 것이다. 동기생들과 정분을 나눌 시간으로는 너무나 짧은 세월이었다. 그러고는 그 동기생들과는 영원히 한 교실에서 공부해보지를 못하게 운명 지어졌다. 동기생들은 모두 전쟁 통에 뿔뿔이 흩어졌다. 운이 좋은 사람은 1, 2년 혹은 3, 4년 후에 복교할 수 있었지만 동기생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동기동창을 잃어버린 졸업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짧은 3주간의 신입생 생활이었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몇 가지 장면들이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 첫째는 등교할 때의 장면이다. 그 시절에는 주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촌역에서 내리고, 거기서부터 한 15분 정도 굴다리를 지나 걸으면 연대 입구에 도달하게 된다. 거기서부터는 길 양쪽에 백양로가 학교 정면의 언더우드 동상을 향해 쭉 뻗어 있었다. 한 500m는 족히 되었다고 기억된다. 지금 길 양편에 들어서 있는 건물들은 하나도 없었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던 것 같다. 그 백양로를 걷노라면 마치 천성(天城)을 향해 걷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고 그 상쾌하던 기분은 아직도 깊은 인상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둘째는 채플 시간에 대한 것이다. 1교시를 끝내고 2교시가 채플 시간이었다. 그 당시는 노천강당에서 채플을 보았다. 일주에 세 번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소나무 우거진 그 노천강당으로 걸어 들어갈 때의 기분 또한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즐거움이었다. 강사로는 백낙준 총장님을 비롯해서 심인곤 교수와 같은 분들이 그 해박한 지식과 깊은 신앙심과 낭랑한 음성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욱이 6·25가 나던 날과 그 이튿 날, 총학생회 주관으로 고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고 신앙강좌를 했던 곳이 바로 이 노천강당이었다. 지금도 함석헌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말씀이 내 마음 속을 사로잡고 있다. 강연 도중에 북의 소련제 야크 비행기가 서울역을 폭격하고 있었다. 당황한 학생은 급히 노천강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함 선생님은 강연을 계속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시간에 신앙을 어떻게 지키느냐이다.” 내가 마음속으로 신앙의 무서운 힘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셋째는 학생증과 학교 배지를 받았을 때의 흥분이다. 내가 확실히 연대생이 된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입학하고 일주일 쯤 지났을 때 우리는 학생증과 학교의 배지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 학생증에 적혀 있는 나의 본적 문제 때문에 서울이 일시적으로 함락되었을 때 북의 공안원에 걸려 고생을 본 일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 학생증과 학교 배지가 너무 자랑스러워 전쟁터를 돌아다닐 때도 늘 모자에 배지를 달고 다녔다. 그런데 그만 덮개 없는 군용 지프차를 타고 후퇴를 하다 바람에 모자가 벗겨져, 더불어 배지까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배지를 지금은 갖고 있지를 못하다. 나는 요즘 학생들이 왜 학교 배지를 안 달고 다니는지, 왜 학교에 대한 자긍심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대한민국에서는 교육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1951년에는 전시연합대학이 생겼고, 부산 영도에는 연세대 분교가 가교사로 세워졌다. 나도 1년 반 만에 부산분교로 복학하게 되었다. 나는 영도 바닷가 언덕 위에 판잣집을 짓고 고학을 하게 되었다. 고학생들의 판잣집은 세 개 정도가 있었다. 높은 언덕 위인지라 아래로 영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고 멀리 오륙도가 아물거리며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달밤이면 잔잔한 바다 위에 달빛이 반짝거리고 뒤에는 바위산이 있어 말할 수 없는 낭만적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날 밤은 폭풍이 몰아치면 철썩거리는 파도소리 요란하고 판잣집에 들이치는 거센 비바람이 휙휙 거릴 때는 아름다운 낭만은 간곳이 없고 노한 폭풍소리만이 사람의 간장을 서늘케 하곤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자연의 가혹함과 무서움을 동시에 경험하는 때이기도 했다. 이 판잣집에서 세 학기를 보내고는 9·28서울수복을 맞아 서울본교로 복교되었지만 낭만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영도의 분교시절 또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1957년에 코스모스 졸업을 하고 곧 이어 연세대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여 1960년에 졸업을 했다. 졸업 후에는 이화여대에 취업이 되어 36년간 봉직을 하고 1996년 가을학기에 정년퇴임을 했다. 지금은 은퇴를 하고도 1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한 셈이 되었다. 나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연대의 학창시절을 시작하던 고 짧은 3주간의 세월이 가장 인상 깊게 마음에 각인되어 있다. 그로 인해 동기동창이 없는 기구한 졸업생이 되기는 했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3년 선배인 김동길 박사와 고 이근섭 교수와는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어서 큰 행운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분들이 없는 나의 인생은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 다니던 시절에도 영문과에는 여러 명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