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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 단상 (50 김형국) (2008.04.17)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단상


50 김형국




1950년 5월인가? 하도 세월이 오래 되어 기억이 희미하지만, 나의 뇌리에는 선명하게 박혀있는 천연색 사진과도 같은 한 장면이 있다. 열아홉 살 소년이 진주라 천리 길을 기차를 타고 버스를 이어타고 그리고 걸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지금은 의과대학병원이 있는 거기쯤, 조그마한 산 고개를 넘어 백양로라고 기억되는 그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옷 가방을 든 채로는 교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무턱대고 어떤 문을 여니, 거기가 바로 전화 교환실. 아가씨에게 가방을 좀 맡아 달라고 신신부탁 머리를 조아리고 입학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시험지를 앞에 두니 웬 땀은 그렇게 흐르는지 수건으로 닦고 또 닦으면서도 답안지를 쓸 엄두도 못 내다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서야 드디어 답안지를 작성. 1차 시험 합격. 그리고 구두시험. 최종합격. 사람들이 선망하고 동경하는 연희대학교 영어영문과 학생이 되었다. 그야말로 금문으로 들어선 것이다.


벅찬 가슴 안고 시골 고향집으로 내려갔더니 어머니는 그저 무덤덤, 칭찬도 없이 공부 시킬 걱정만 태산이시다. 개학은 6월 1일, 서대문 충정로에 하숙집을 정하고 학교에 가니 담쟁이 넝쿨이 교실 바깥벽을 파랗게 기어올라 싱싱하다. 옛날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거기도 고색창연한 모습이 어쩌면 연희대와 그렇게도 닮았는지 나는 이런 분위기에서 영어를 가르치신 선생님의 첫 시간, 길을 몰라 헤매다가 5분쯤 지각을 하였다. 선생님은 강의하시다말고 지각한 날 보시고는 따끔하게 꾸지람 한마디. “5분, 10분 늦는 그런 정신 가지고는 공부 못해요.” 이 꾸지람이 서운하기보다는, “웬 미국 사람이 저렇게 우리말을 잘하시나” 감동이었다. 그리고 이 꾸지람이 평생 동안 시간이라면 칼같이 지키는 인생을 살아온 동기였다면 아마 과장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고백한다.


우리나라 영문학계의 태두이셨던 교수님들이 우리 과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orange색깔이 orange임을 알았다. 희미하게나마 여기서 Shakespeare를 상상하고, Milton을 읽고, Eliot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그 자리 그대로 있는지 모르지만 문과대학 본관 건물 바라보고 왼쪽에 있던 기다란 교실에서 주로 수업을 받았다. 여름엔 밖에서 더위에 시달려 땀이 범벅이 되었을 때도 이 건물 현관으로 들어서면 얼마나 시원했었는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어깨 위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 이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문과대학 건물 뒤쪽 숲은 그때만 하여도 외지다 못해 으슥한 기분이 들 정도여서 그리로 혼자 산책하는 것조차 될 수 있으면 삼갔을 정도였다. 지금은 50여 년이 흘렀으니 감히 그대로이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으랴, 상전벽해가 아니라 벽해가 상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하루 공부를 마치고 학교를 출발하여 백양로를 걸어서 끝까지 나오면, 지금 대학병원이 있는 그쯤에 조그마한 언덕 같은 산이 있었는데, 비탈길을 타고 오솔길을 넘어서면 기찻길 밑 굴다리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 넓은 비포장 황톳길 같은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거기가 종점이라 학생들이 한사람 남김없이 다 올라타고 서울 시내로 흩어져 가는 것이다.


이러던 중 6월 25일 일요일 책 한권 들고 친구와 같이 동대문운동장으로 축구시합 구경을 갔다. 갑자기 시합을 중단한다는 방송이 나오고 관중들은 뿔뿔이 영문도 모르고 흩어졌다. 호외가 도는데, 한국지도를 그려놓고 38선에서 전쟁이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화살표를 그렸다. 여느 때도 자주 시끄러웠으니 이번에도 그러다가 말겠지 생각하였는데, 이번에는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머리띠를 두르고 트럭을 타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가는 젊은이들이 눈에 띈다. 이튿날 26일 월요일에 학교에 갔다. 점심때면 항상 있었던 Chapel도 그대로 하고 수업도 어김없이 진행되는데 멀리서 가늘게 들려오는 대포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학교에서는 아무런 지시도, 광고도 없고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다음날 27일 화요일에 학교에 갔더니 분위기가 좀 어수선해 보인다. 노천극장에 모인 학우들은 강연이 있을 거라는 말을 서로 전한다. 드디어 연사 등단. 그 특유의 복색을 하고 단상으로 올라가더니 무언가를 진하게 호소하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열정이 역력해 보였다. “∼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가 되라!” 글쎄 무슨 뜻일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희한한 말씀이었다. 대포소리는 점점 가까이서 들려온다. 하늘은 찌뿌듯이 구름이 가득 끼어 있고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다. 한밤중에 비는 왜 그리도 퍼붓는지 한발자국도 바깥에 나갈 수 없다. 피난을 가려고 몇 번이나 딸막거리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잠을 깨니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날부터 쌀도, 감자도, 보리도 없고 강냉이도 없고 하숙집 주인은 하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나 남아 있는 거라고는 메밀 한 말이었다. 이것으로 죽을 쑤어 목숨만 이어간다. 한강다리는 끊어졌고 강을 넘어가야 고향으로 간다. 한강에서 보트를 하나 빌려 타고 노를 저어 저편 언덕으로 올라가니 아마 거기가 흑석동이었나 보다. 굶으며, 다리를 절며, 러닝셔츠 하나 달랑 입고 완전한 거지꼴로 남으로, 남으로 가는 것이다. 그 사이에 일어났던 구사일생의 사건들은 이 글을 쓰는 취지와 관계가 없어 다 생략한다.


비는 장대같이 쏟아지는데 흠뻑 맞고 부산의 서면에서 우리 학교가 가교사를 지어 놓았다는 부산 영도까지 이불 하나 달랑 짊어지고 걸어서 간다. 언젠가 꼭 한번 가 본적이 있는 절친한 친구 집을 생각해내고 요행히도 찾아갔다. 바깥에서 이름을 불렀더니 자지러질 듯 반가워하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친구 형이 하는 유리공장 숙직실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정식으로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생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피난민이라 돈이 있나, 쌀이 있나, 어쩔 수 없이 가정교사도 하고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여 받은 강사료를 모아 그 다음 등록금을 준비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영도 제2송도 해변가 절벽 위에 세워놓은 연희대학교 가교사. 거기서 나는 Shakespeare를 읽고 영시를 읊조리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영국의 시골풍경을 마음껏 상상하기도 하였다. 소설도 수필도 희곡도 시도 여기서 생각하고 해석하였다. 시에는 음악적인 효과를 내는 Metre가 있고 Iambus, Anapaest, Trochee, Dactyl 로 scan 된다는 것도 여기서 배웠다. 어찌 보면 너무나 큰 Irony가 아닐 수 없다.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는 주제에 시가 어떻고, 소설이 어떻고, 희곡이 어떻고, 영국을 생각하고, 미국을 떠올리고 거기서 생성되어 소멸되어간 인간의 질서를 느끼고 분석하는 것인가?


제2송도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지어놓은 판잣집들. 그 속에는 미래의 이 나라 일꾼들이 혹은 자취를 하고 혹은 숙식을 해결하고 그날, 그날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절벽 위에 평평한 곳에는 학교 가교사들이 서 있고 수많은 학생들이 기다란 의자에 앉아 그 다음 시간의 수업을 기다리고 있다. 교수님들은 바닷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교실로 들어가시고 그리고 나가시고 이런 풍경이 수년 동안 이어지더니 이제 졸업이 가까이 되자 어느 날 갑자기 환도, 서울로,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다. 드디어 또 담쟁이 넝쿨이 싱싱한 그 문과대학 건물 앞 계단에 학생들이 모여들고 그리고 졸업. 세상에 이런 기구한 학창생활이 또 어디 있을까? 입학은 서울에서 하고 한 달도 안 되어 전쟁이 일어나 부산에서 피난 수업을 하면서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가교사에서 보내고 그리고 졸업은 또 서울에서 했던 철새 같은 인생, 학문, 학창생활,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은 유별나고 특이한 팔자라는 느낌이다.


전쟁이 끝난 신촌 로타리, 아현동 언덕배기 고가도로가 없고, 서대문에서 마포로 가는 전차는 고개를 넘으면서 힘이 들어 꼭대기 전선에 붙어가는 도르래에 시퍼런 스파크가 번쩍번쩍하는 모습을 뒤로 하고 굴레방 다리에서 이화대학 앞을 지나 신촌 로터리까지 언제나 질펑질펑한 흙탕길 거기를 걸어 다니면서, 옛날 영국 런던거리가 포장되기 전에 진흙길이었던 시절, 좀 흙탕물이 덜하고 말라있는 집 담벼락 쪽에 붙어서 걸어가려고 애쓰다가 앞에서 오는 신사와 마주쳐서 서로 비켜주기를 바라면서 누가 양보하느냐를 고민하던 작품을 생각하면서 기찻길 밑 굴다리를 지나 언덕길을 돌아 백양로를 따라 담쟁이 문과대학 건물 현관 속으로 들어가는 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는 바뀌고 눈에 보이는 풍경은 그때 그 시절은 아니지만 이 얘기를 머리에 떠올리면 그 골격은 그대로인 것 같은 느낌. 지금부터 50년 후에 현재 학생들이 내 처지가 되어 꼭 같은 느낌을 갖지 않을까. 영어영문학과여, 영원하라.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