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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 50년이 엊그제 같은데 (52 김영순) (2008.04.17)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50년 전이 엊그제 같은데


52 김영순




나는 6·25 전쟁 중인 1952년 부산 영도에 임시 교사를 마련한 연희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마산고등학교 동기생이 모두 16명이 입학하였는데 국문과, 영문과, 사학과 학생이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고려대학은 대구에 피난학교를 마련하였고 대부분의 학교들이 부산 대신동에 있었다. 임시 수도인 부산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매일 정치 집회가 열려서 거리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집이 마산이라 첫 학기는 마산에서 기차통학을 하였다. 많은 친구들이 기차통학을 하였는데 여름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4시 50분발 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하면 9시 전후였다. 열심히 걸어가야 1교시 마칠 시간 즈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영도다리는 하루에 두 번, 오전 10시와 오후 4시 다리가 들렸는데, 15분 동안 들려 있으면 큰 배들이 지나간다. 기차가 늦게 도착한 날은 종종 다리 앞에서 15분을 기다렸다. 하교할 때는 오후 6시에 부산역을 출발하면 10시 전후에 마산역에 도착했다. 정시에 도착하는 날은 거의 없고 평균 30분에서 1시간 정도 연착하였다. 간혹 12시 넘어 도착할 때도 있었는데, 어떤 날은 다음날 새벽 4시에 도착하여 학교에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의 통근열차는 열차시간표는 있었지만 부산역에서부터 정한 시간에 떠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중간 역에서는 이유도 모른 체 무한정 몇 십 분에서 1시간씩 대기하기 일쑤였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고 으레 그러려니 하였다. 열차는 화물칸을 개조한 것도 있고 그냥 화물칸을 그대로 운행하는 날도 있었다. 특히 미군 병원열차가 통과하는 경우에는 정차역에서 한두 시간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 열차가 통과할 때는 선진국의 기차처럼 보였고 모든 승객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등교할 때는 초량역에 내려서 달리는 화물차를 훔쳐 타거나 영도 가는 전차를 타기도 하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고 목숨을 건 행동을 매일 반복하면서 통학하였다.


전쟁 중인데도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출석 점호가 엄격해서 3분의 2이상 출석하여야 하기 때문에 학점 따기가 어려웠다. 친구들이 다니는 다른 대학과 비교하면 고등학교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1학년 2학기와 2학년 1학기는 부산에서 가까운 물금(구포 다음 역)의 이모님 댁에서 통학하였다. 부산 피난학교에 다니던 3학기 동안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1학년 때는 밝고 큰 강의실이었지만 2학년 때는 어두운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하였다. 비가 오는 날은 교실에 비가 뚝뚝 떨어져서 수업에 지장이 있었다.


1953년 휴전과 더불어 학교가 환도하였다. 신촌 역전에 영문과 동기생인 조재화 씨와 한방에 하숙하였다. 하숙집과 강의실은 도보로 15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백양로를 걸어갈 때면 자주 백낙준 총장의 세단차가 지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어느 날은 총장 차보다 훨씬 멋진 외국인 세단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같이 가던 친구가 “백낙준 차는 호로자식이다”라고 말하여 모두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어떤 사물이 다른 것과 비교해서 모자란 것은 “o o o은 호로자식이다”라는 말을 우리끼리 하면서 많이 웃었다. 그 당시 신촌과 서대문 사이에 서울교통이 30분 간격으로 버스가 다녔는데 연대와 이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후 5시 이후에는 버스가 없어서 걸어서 다니기도 하였다. 신촌 사람들은 시내 갈 때에 문안 간다고 말하여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겨울방학이 되어 마산 집으로 갈 때는 10시간 이상 기차를 탔는데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 가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3학년 때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2년간 휴학하였다. 1956년 복학하여 친구가 있던 봉원사(새절이라고 불렀음)의 스님 집에서 하숙하였다. 봉원사에서 강의실까지 가는데 15분이 걸렸으며 산을 넘어 가는 오솔길이 참으로 좋았다. 나는 기독교인이었지만 봉원사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냈고 2년간 하숙하였던 스님의 가족과는 지금까지 우리 부부가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당시의 신촌과 연희동은 시골 마을 같았는데, 지금의 신촌과 비교하면 천지개벽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변하였다. 그 당시 신촌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들을 만나면, 하숙비와 등록금으로 신촌 일대의 땅을 샀으면 대학 졸업생 100명 이상을 거느리는 기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란 농담을 하기도 한다.


1959년 친척의 소개로 경상남도 도립 부산맹아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는 대학 졸업생에게 전공과목의 고등학교 준교사 자격증을 주었으므로 교직과정을 이수하지 않아도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특수교육을 하면서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온 정성을 쏟아 교육에 열중하였다. 1971년 한 달 동안 일본의 특수교육을 견학하고 돌아온 후, 30년 뒤떨어진 한국의 특수교육을 일본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일념으로 불철주야 열심히 노력하였다. 교사 16년, 교감 10년, 장학사 2년, 교장 12년을 하루같이 40년 5개월을 보냈다. 부산맹아학교, 부산농아학교, 부산혜성학교에 근무하면서 재정이 투입되는 학교 건물 신축 등 특수교육의 인프라 구축에는 계획했던 바를 대부분 이루었으나,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특수교육 전문가를 많이 양성하지 못한 것은 아쉽게 생각한다.


1999년 정년퇴직한 후, 학부모들과 힘을 모아 발달장애인복지협회 사단법인 나사함(나누고 사랑하며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설립하여 7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장애인복지법에 15개의 장애 영역이 있는데,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예산이 충분하면 일정 수준의 복지가 가능한 장애가 대부분이지만, 발달장애는 금전적인 지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 옆에는 어머니가 있거나 보호자가 늘 함께 있어야 한다. 발달장애인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다. 금년에 발달장애인을 소재로 만들어 유명해진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 군과 수영 선수 김진호 군의 뒤에는 냉정하게 바른 판단을 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립 능력을 키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이다. 나사함은 그들에게 자립 역량을 키워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사회가 그들을 이해하도록 계몽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고 그들의 어머니들이 먼저 죽으면서도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꾸준히, 천천히 노력할 것이다.


40여 년간 다양한 장애인과 장애인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보람을 느끼는 일도 많이 있었지만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무시를 받은 적도 더러 있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나와서 왜 이런 학교에서 근무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일을 한다고 존경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가 있어서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특히 58연문회에서 만난 박영식 총장은 교육부장관 시절에 부산에 초도순시 오시면서 내가 근무하는 부산혜성학교(정신지체 장애학교)를 방문하여 새 교사를 지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장애인 교육에 오랫동안 봉사함을 인정해 주시면서 인간적인 배려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신 것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내가 47년간 장애인의 교육과 복지에 정성을 쏟을 수 있게 한 성경 말씀을 소개한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 31절∼40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누가복음 14장 12절∼14절)』. 이 말씀이 나에게 믿음과 위로가 되어 어려움과 괴로움을 이길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1남 3녀에 며느리와 세 사위, 일곱 명의 손자, 손녀를 둔 다복한 사람으로 여생을 장애인과 더불어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