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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 고맙다, 연대 영문과 (53 김우옥) (2008.04.17)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고맙다, 연대 영문과!


53 김우옥




1953년 4월 나는 연희대학교 영문과 1년생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정전상태였지만 서울은 아직 전시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뿔뿔이 갈라진 가족들은 서로 만나지도 못했고 고등학교 대학교 할 것 없이 부산으로 피난 갔던 분교들은 서울의 본교와 합해지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속에서 학교공부가 제대로 제 자리를 잡을 리 없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도강을 할 수 없어 모교를 다니지 못하고 훈육소라는 피난수용소 같은 종합학교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들어간 곳이 연희대학교 영문과였다.


영문과에 들어간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체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환경에서 오로지 취미를 갖고 공부한 것이 영어였기 때문이었다. 모든 과목은 다 포기해 버리고 영어에만 집착했다. 늘 영어사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어디서건 사전을 펼쳐들고 영어를 읽곤 하였다. 수학, 물리, 화학, 생물 등 기타과목들은 시험 때 벼락치기로 공부하여 적당히 점수를 따면 됐다. 오로지 영어 그리고 국어만 열심히 했다. 그러니 방향이 자연히 정해진 셈이다. 문과, 그 중에서 영문과. 연희대학교는 수학을 0점을 받아도 총점으로 합산해서 입학할 수 있다고 해서 연희대학교를 택했다.


우리가 입학했던 1953년 봄에는 부산으로 피난 갔던 연희대학교가 아직 부산에 머물고 있으면서 서울의 본래 캠퍼스를 사용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런 이유로 53년 4월에 입학한 1학년생 약 50여 명이 서울 연희동의 그 넓은 본교캠퍼스를 다 쓸 수 있었다. 숲과 노천극장 그리고 정취 있는 석조건물들을 모두 차지하면서 아주 낭만적인 한 학기를 꿈처럼 지냈다. 그때는 학교에 오자면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등교 시간에는 모두 서울역에 모여들었는데 위치상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녀야 했던 이화대학교 신입생들의 발랄한 모습들이 우리를 흥분시켰다. 그런 생활은 단 한 학기로 끝났고 2학기부터 부산분교가 올라오면서 캠퍼스의 오붓한 분위기와 기차통학의 즐거움은 다 끝나버렸다.


6·25전쟁 직후 대학의 분위기는 지금의 그것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툭하면 휴강이었고 수업시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학년 첫 학기를 종로5가 창신동에 있는 아는 분 댁에서 통학을 하다가 2학기부터는 영등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통학을 하게 되었는데 영등포에서 연희동까지 매일 통학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휴강에다 신통치 않은 수업이 반복되면서 나는 대학에 나가 수업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개인적인 공부를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6·25에 참전한 이탈리아군인병원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던 분의 권고로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공부를 위해 서울시립도서관에 매일같이 나가 아침부터 밤까지 혼자 공부를 하였다. 그 뒤, 이탈리아어를 공부한다는 이유로 신길동에 주둔하고 있던 이탈리아군인병원에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생활을 약 1년 동안 하였는데 그동안 학교는 거의 나가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대리출석을 부탁하여 출석점검 때 가성으로 대답을 하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이 통할 수 있었을 때이니 어떻게 보면 낭만적인 시대이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엉망이던 시대이기도 하다.


대학교 시절을 지금 돌이켜 보면 대개가 희미한 과거의 장면들로 떠오르지만 그 중에서도 비교적 선명하게 떠오르는 몇 분의 교수님들이 계시다. 영문과를 다녔으면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교수님은 국문과의 김윤경 교수님이다. 비교적 큰 책가방을 갖고 들어오셔서 힘 안들이고 찬찬히 조리 있게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강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문과의 간판교수이셨던 최재서 교수님은 항상 스리피스 정장에 나비타이를 매고 들어오셔서 강의하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셰익스피어 강의를 하시다가 툭하면 연극이야기를 하시던 발랄하신 오화섭 교수님도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가장 많은 수업을 들었던 분이 이혜구 교수님이었던 것 같다. 영시강의와 셰익스피어 강의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씀이 어눌하시고 유난히 비음이 강하셨던 생각이 난다. 옷에 별로 신경을 안 쓰셔서 그랬던지 바지는 항상 배꼽 밑으로 내려가 있어서 불안하게 느끼던 것도 생각난다. 그분들 외에도 언제나 얌전한 여자처럼 강의하시던 이봉국 교수님, 영문법 책을 아예 통째로 외워서 가르치시던 최석규 교수님, 꼬장꼬장하게 한 문장 한 문장 칠판에 적으시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강의하시던 심인곤 교수님, 그리고 다른 몇 분이 지금 내 눈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영어가 좋아서 영문과에 갔던 나에게 이런 여러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영어 그리고 영문학에 대한 지식을 더욱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이 서른이 넘어 평생 매진할 것으로 생각했던 영문학을 훌쩍 버리고 연극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게 되었다. 연극과 영문학이 전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연극은 연극이고 영문학은 영문학이다. 나는 이따금 생각한다. 내가 연극으로 전공을 바꾸지 않고 영문학 교수나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하였다면 어땠을까 라고. 그러나 솔직히 지금의 나와 지금의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기에 연대 영문과의 울타리를 벗어났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하나의 울타리에 묶이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배울 수 있었던 연희동산의 자연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내 인생과 영문학을 뗄 수 없게 묶어 놓는 절실한 강의를 듣지 못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도 영문학 언저리에서 늙어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모교 교양영어학부에서 시간강사로 가르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전임으로 발탁되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랬다면 연극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신촌에 갇혀 근엄한 영문과 교수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정전상태로 지속되어 온 지 50년이 넘었다. 우리가 대학에 입학한 것이 정전직후였으니 그 당시 대학의 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갈 것이다. 하긴 지금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강의들을 보면 오히려 그때의 형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역설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튼 50년대초 대학을 다니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의실 안에서가 아니라 강의실 밖에서였다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강의실 밖이라면 두 군데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도서관이다. 나의 대학 4년을 돌이켜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도서관이다. 앞에서 말한 서울시립도서관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기 위해 하루 종일 죽치고 있던 일과 시간만 나면 대학도서관에 가서 영어 원문으로 된 책들을 미친 듯이 읽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특히 졸업할 때까지 몇 년을 변함없이 다닌 대학도서관은 나의 인간성장의 귀중한 현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곳에서 읽은 책들 중에 두툼한 두 권의 원서는 내가 삶을 헤쳐 나가는데 크게 도움을 준책들이다. Sigmund Freud의 The Interpretation of Dreams는 인간의 내면을 분석하는 방법을 세세히 가르쳐 주어 일상생활에서 접촉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지침 노릇을 했을 뿐 아니라 그 책을 읽고서 15, 6년이 지나 시작하게 된 연극작업에서 인물 및 상황분석을 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또 한권은 우연히 읽게 된 James Boswell의 Life of Samuel Johnson이었는데, 그 책 속에서 권위 있는 평론가로서의 새뮤얼 존슨보다는 삶을 폭넓게 사는 인간 새뮤얼 존슨의 흥미로운 인생을 생생히 읽음으로써 나는 앞으로 닥칠 나의 삶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실제로 살면서 나도 모르게 새뮤얼 존슨의 삶을 모방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강의실 밖 공간은 ‘연희동산’이었다. 백양로를 한참 걸어 들어오면 나오는 서너 개의 돌로 지은 교사 말고는 그 광활한 캠퍼스가 온통 숲이요, 나무요, 풀밭이었던 때다. 자연히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쉬는 시간이나 휴강시간에 여기저기 흩어져 젊음을 발산하곤 하였다. 나는 2학년 때 편입학해서 들어 온 함경북도 경성 출신의 최익환과 서울 토박이 표한룡 그리고 인천 송도고 출신의 김윤경과 주로 어울렸다. 대개 시답잖은 잡담들을 주고받았지만 때로는 심각한 이야기도 오갔다. 햇볕이라도 따뜻하게 비치면 익환이는 잔디 위에 누워 불어로 샹송을 부르곤 하였고, 나는 이탈리아어 좀 배웠다고 오페라의 아리아를 원어로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이따금 익환이와 저녁에 만나 싸구려 막걸리를 마시며 그동안 읽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 인생에 대한 나이브한 이야기들을 열 내며 나누던 일들이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던 대학시절이 내게는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리고 좋아하던 영어공부를 맘껏 할 수 있었고 영어를 실컷 읽을 수 있었던 연대 영문과 시절은 영어에 푹 빠진 내게는 분명 행복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 뒤늦게 연극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들어가 미국에서 연극공부하고 연극작업을 할 때 연대 영문과에서 익힌 영어의 도움을 크게 입었기에 모교가 더더욱 고맙다. 그러나 내가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늙어가면서까지 마음을 터놓으며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바로 연대 영문과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지식을 흠뻑 얻고, 인간되기를 철저히 훈련하고 거기다 죽을 때까지 친하게 지낼 벗을 얻었으니, 더 이상 뭣을 바라겠나? 고맙다, 연대영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