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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 마지막 연희대 영문인의 (53 신극범) (2008.04.17)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연세대 영문과 재학 시절을 회고하며:

마지막 연희대 영문인의 자부


53 신극범




학과 창설 60주년을 맞이하여 영문학과 60년사를 간행하는 데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이 짤막한 회고의 글을 쓰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어 광복을 되찾은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그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6·25전쟁 중 부산에 피난 가서 당시 영도에 위치한 분교에서 2년의 과정을 마치고 1955년 3월에 서울 본교로 편입하여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부산 분교 시절의 학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이과, 공과의 계열로 편성되고 총 200명 내외의 규모였다. 인문과는 약 40명이 함께 수업을 받았다. 본교로 복교 편입하면서 문과 40명 중 6∼7명이 영문과로 합류하게 되었다. 계열별로 수강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여러 학과의 학우들과 상호 교분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또한 나를 외롭지 않게 하였고, 나에게 폭넓은 교우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한 것으로 느껴진다.


필자가 부산에서 공부하던 당시에는 피난 내려온 많은 학생들이 가정교사, 노동 등의 일을 하며 고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필자도 다행히 중학교 때부터 영어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당시 부산역 앞에 위치한 부산일보 사옥 2층에 있던 미군 병참기지 사령부 민사처(Civil Affairs Office) 야간 통역관으로 근무하며 학생생활을 하였다. 부산에서 민사처의 통역관 경험이 큰 기반이 되어 졸업 후 고향으로 내려가 대전공업고등학교(현 한밭대학교) 영어교사로 바로 채용되었고, 2005년 2월말 대전대학교 총장직 4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근 50년 동안 한국 교육계에서 계속 일을 하고 은퇴하였다. 나의 오늘이 있게 한 모교에 감사함을 느끼고 연세 영문학과 학창시절이 한없이 그립고 자랑스러우며 졸업생으로서의 축복감을 느끼면서 이 글을 쓴다.


재학시절에 있었던 연세인으로서 경험한 몇 가지 생각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련다. 먼저 부산 분교시절에 나에게 영향을 주신 여러 교수님들 생각이 떠오른다. 종교음악을 직접 지도해주신 한영교 학장님, 참으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로 우리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셨다. 한 학장님의 외동 따님도 우리와 함께 공부를 하였다. 문학개론을 강의해 주신 장덕순 교수님(후에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정년하심), 부산대 교수로 계시면서 연대에 출강하신 소설가 김정한 교수님, 국사 강의를 담당하시던 홍석보 교수님(후에 한양대 교수로 정년하심), 서양사를 가르쳐 주신 조민하 교수님은 후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셨다. 필자가 USOM 교육국에 재직 시 자주 뵙고 많은 도움도 받았다. 교양 영어를 지도해주신 이명근 교수님도 기억에 떠오른다.


1955년 3월 서울본교로 진학한 후 나는 연세 영문인으로서 더욱 큰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 연세의 영문학과 교수진이 다른 어느 대학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영문학사와 문학비평을 강의해주신 경성제대 출신의 최재서 교수님, 셰익스피어를 강의해주신 와세다대를 나오신 오화섭 교수님, 영시 강의를 맡아주신 국악계의 거두이셨던 경성제대 출신 이혜구 교수님, 영미소설 강의를 맡아주신 일본대 출신의 권명수 교수님, 영어학을 지도해주신 옥스퍼드대를 나오신 김선재 교수님, 영어 교수법을 지도해주신 모교 출신 전형국 교수님과 일반영어 이봉국 교수님과 불어를 지도해주신 최석규 교수님 등 여러 교수님들의 모습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나의 기억에 생생히 떠오른다. 필자가 십여 년 전 한 친지의 아들 주례를 맡은 일이 있는데 그때 신부가 이봉국 교수님의 따님이었다. 필자는 교육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학과 오기형 교수님, 임한영 교수님, 강길수 교수님 그리고 김용기 교수님의 강의도 수강하였다. 필자가 대학원에서 교육행정을 전공하는 데 연대시절 교육학을 공부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고 1996년부터 2년간 필자가 한국교육학회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영문과 동문이신 송석중 교수님과 김진우 교수와의 특별한 인연을 전하고 싶다. 필자가 1969년 가을 미국 정부장학생으로 미시간 주립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유학 생활을 할 때 그곳에서 송석중 선배를 만났다. 송석중 교수는 필자보다 일 년 선배이시지만 재학 시절 여러 강의를 나와 함께 수강하여 아주 친숙한 사이로 참으로 반가웠다. 송 교수님은 당시 미시간 주립대 동양어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다. 1970년 여름 모교 오화섭 교수님께서 정부지원으로 미국교육 시찰여행을 하시던 중 미시간 주립대를 방문하셨다. 그때 송석중 교수님 댁에서 연대동문 학생가족이 모여 밤새도록 맥주와 양주파티를 하며 오화섭 교수님의 위트와 유머 섞인 모교 소식과 국내소식 그리고 인생강의를 마음껏 즐겼던 일을 지금도 우리가족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 오화섭 교수님은 희곡을 전공하시어 유머가 풍부하셨고 인간미가 참으로 많으신 스승이셨다. 그날 우리에게 남기고 가신 말씀이 생각난다. “이번에 서울로 돌아가면 교수들이 미국 이야기를 또 하면 ‘왕년에 미국 안 갔다 온 사람 있나’ 하고 가만히 안두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폭소하셨다. 그 당시 미국 경험을 하지 못하신 오 교수님께서 미국 다녀온 교수님들이 미국 이야기를 자주 하고 숭미적 주장을 할 때 몹시 아니꼽게 생각하신 것 같았다.


미국에 있을 때 송석중 교수님 댁에서 세계적 언어학자 김진우 동문을 만난 것도 큰 인연이었다. 내가 대학 3학년 때 노고산 기슭 천막집 셋방에서 일 년 후배인 김진우 박사와 함께 자취 생활을 하여 동기간 같은 친구였다. 졸업 후 십수 년 만에 만난 후배인 김진우 박사는 일리노이 대학 교수가 되고 선배였던 필자는 박사과정 학생이 되어 이국땅 선배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만나게 된 인연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유학하던 그때만 해도 외국 여행이 쉽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다. 자취 동기생인 김 교수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언어학자가 되어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2002년도에 KBS가 수여하는 명예로운 해외동포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연세 영문인으로서 필자는 큰 부담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크게 자랑할 만한 업적도 없이 영문학과 총동문회로부터 대전대총장으로 재직하던 2001년에 자랑스런 영문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명예를 끝까지 지켜 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교와 영문학과 발전을 위하여 보탬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많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나의 능력과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끼고 있다. 연세 영문인 모두에게 감사하고 동문 한분 한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기를 빌면서 필자가 20여 년 전 한양대 사범대 학장 재직 시 나의 대학 시절을 회고한 짤막한 글을 끝으로 덧붙인다. 연세영문과 만세 !!




내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로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대학 2학년 때 휴전이 되어 정부가 서울로 다시 돌아오고 피난 왔던 서울의 여러 대학들도 복귀를 서둘렀다. 우리대학도 54년 봄 서울로 옮김에 따라 나도 피난 보따리를 이끌고 서울로 이동하여야만 했다. 한 지게꺼리의 이삿짐을 끌고 부산역을 떠나 십여 시간 만에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지게꾼 아저씨에 짐을 지워 걸어서 명륜동에 사시던 아저씨 댁에 짐을 풀었다.


당시만 해도 집안끼리는 물론 남남 사이라 하여도 인심이 좋은 편이여서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대단하였다. 많은 시골학생들은 가정교사 생활로 식생활은 족히 해결할 수 있었다. 나도 한때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졸업학년이 되니 전차와 버스를 타고 오가는 시간이 너무 걸려 학교 뒷산 넘어 동네에 있는 최씨댁 초가집에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그 집은 울안에 큰 감나무가 있어 연희동에서 감나무집이라 불렸다. 동네 토박이인 집주인 최씨 영감은 자기 집에서 자취나 하숙을 하고 연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성공한 큰 인물이 많은데 이중에는 서울대 총장을 지내신 최규남 박사도 포함된다면서 좋은 집터임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나에게 희망을 준 것도 사실이다. 주인 할머니가 가끔 내 자취방 앞을 지나면서 “이 학생은 남학생인데 이렇게 주방을 깔끔하게 써” 하며 감탄하는 소리도 들었다. 이웃집에서 자취하는 E대학 학생의 주방과 비교해서 하는 평이었다. 그리고 주인집에서 별난 음식이나 반찬을 자주 건네주기도 하였다. 지금 연희동의 넓은 대로를 차를 타고 지나려면 자취도 없어진 그 옛날의 감나무집에 대한 추억이 떠올라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로 시작되는 메기의 추억 노래가 절로 나오곤 한다. 취직에 필요한 학장님의 추천을 받고자 만들어 간 추천서 초안을 보여드렸다가 맞춤법이 틀렸다고 퇴짜를 자주 놓으신 최현배 학장님, 강의 시간에 본인이 발표한 수필집에 담겨진 내용을 소개하시며 수업에 능률을 더해주신 최재서 교수님의 엄하신 모습, 퇴근길에 술을 늦게까지 드시고 통행금지 시간 위반으로 파출소에 초대되어 가방 속을 검사받다 책장마다 여백에 연필로 까맣게 적어놓은 Shakespeare 원전을 발견하고 교수가 이렇게 책을 더럽게 쓰면 되느냐고 파출소 순경한테 꾸중 들은 이야기를 서슴없이 우리에게 털어 놓으셨던 오화섭 교수님의 이야기 등, 나의 눈시울 뜨겁게 만드는 스승님들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 그리워진다.


재학 당시 같은 반에서 여러 해를 공부하면서도 여학생들이 남학생들과 서로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고 수줍어했던 기억, 검정색 물을 들인 군인작업복 한 벌로 겨울을 지내고 구두나 운동화를 기워 신고 다니던 나의 친구들, 그들이 가정이 가난하여서만은 아니었다. 강의실에서, 도서관에서, 공부방에 묻혀 있기에 바빴고 밖에 나와서도 마음속이 차 있으니까 남들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동화는 나이키, 바지는 죠다쉬 등 TV나 신문의 광고 유행을 따라가기를 고집하는 새 세대의 젊은이들이 좀더 인내력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무궁히 추구하여야 할 진리의 세계를 향하여 스스로의 고통을 이겨내며 도취 될 수 있을 때 그 후에 오는 성취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4학년 졸업반 때인 1956년말경 노천극장에서 전교생이 모인 채플 시간에 우리 문과대학 학장님을 역임하시고 당시 부총장님이시던 최현배 박사님 주재로 연희대와 세브란스 양교의 통합에 따른 새 대학 이름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설문조사를 한 기억이 난다. 그때 학교 측에서 두 개의 교명안을 제시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하나는 명덕대학과 또 다른 하나의 명칭을 제시하였는데 학생들이 제시한 학교명은 원안에는 없던 연세대학으로 할 것을 절대 다수 학생들의 의견이 모아져 새 교명이 연세로 결정된 것이다. 나도 그때 연희의 연자와 세브란스의 세자를 딴 연세로 하면 좋겠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이 결정과정에 참여한 것을 큰 보람으로 느끼고 있으며 우리 모교가 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적 대학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비록 연희대학교의 마지막 졸업생이지만 연세로 새로 출발하는 모교에 대한 긍지는 변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