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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 연세 영문과와 나 (54 김진우) (2008.04.17)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연세 영문과와 나


54 김진우




“원자 시대”(the atomic age)니, “정보 시대”(the information age)니 라고 어느 시기/시대를 한 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위험스럽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칭이 너무 총괄적이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한정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간결성 때문에 이런 지칭이 흔히 쓰인다.


나의 1950년대 학창 시절을 한 마디로 특징지으라면, Edith Wharton의 소설의 제목을 빌어, The age of innocence (無垢의 시절)이라고 일컫고 싶다. Innocent란 단어에는 ‘무지’(ignorant), ‘순진’(na?e), ‘무고’(blameless), ‘무죄’(guiltless) 등 여러 관련된 의미가 있지만, 그 주된 뜻은 처음의 둘, 즉 ‘무지’와 ‘순진’이다.


우리 세대는 시대적으로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년은 제2차 세계대전(1941∼45)의 그늘에서 다녔고, 중고등학교 3년은 6·25동란(1950∼53)을 치르며 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아 그제서야 한글 자모를 배웠다. 교과서도 참고서도 없었고 학용품도 귀했다. 5년이 채 안되어 6·25전쟁이 일어나자 사회는 또 한 번 뒤엎어지고, 학교도 학생도 피난 갔다가 돌아왔다. 그때는 이른바 피난교사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가르쳤다. 어느 영어교사는 nowhere를 no where가 아니라 now here로 읽은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런 환경에서 무엇을 제대로 배웠을 리가 없다.


이렇게 학문적 지식에만 무지했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우리 세대는 참 순진했었다. 사상, 문화, 정치적으로 동양에서 서양으로 이동하는 과도기에 서 있던 우리에겐, date니 meeting이니 하는 행동은커녕 단어마저도 없었고, 물론 computer, disk, video 등도 없었다. 노래방, PC방 등의 “향락처”(?)도 없었고, “방”이라곤 다방밖에 없었으니 타락해볼 기회도 없었다!?


내가 지방에서(충남 대전과 강경) 학교를 다닌 탓도 있겠지만, 위에 언급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내가 1954년 봄에 연세대의 교정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내 머리는 거의 비어 있었고, 내 뇌구(腦溝, sulci)에는 주름이 거의 없었다. Omelet과 Hamlet의 차이는 계란에 섞인 고기의 차이인 줄 알았으니까!


영문과에 들어와서 정예의 수업을 받았다. 최재서 선생님의 Hamlet 강독, 오화섭 선생님의 Othello 강독, 이봉국 선생님의 David Copperfield 강독, 최석규 선생님의 영어음성학과 Le Grand Meaulnes 강독 … 이들 수업의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고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서 꼭 언급해야 할 것은, 이 작품들의 강독에서 문학(literary) 영어를 배웠다기보다는, Hamlet의 고귀한 성품, Othello의 열정과 자부심, Falstaff의 재치와 슬기, David Copperfield의 낭만 등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연세대 영문과 없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다.


낭만이란 반드시 남녀 간의 애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산을 받지 않고 실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낭만이고, 꽃샘추위 때 온 봄눈을 만끽하기 위해 수업을 빼먹고 숲 속을 걷는 것도 낭만이며, 달리던 차를 멈추고 황홀한 석양이나 무지개를 감상하는 것도 낭만이다. 이런 낭만의 정신을, 연세인 특히 연세 영문과의 동문들은 일생 동안 몸에 간직하고 실천하며 산다.


우리는 영문과에서만 배우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타과에서의 수강이 자유로웠다. 그래서 국문과의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선생님, 철학과의 김형석, 정석해 선생님들의 강좌를 수강했다. 그런데 이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책 속의 지식만이 아니고, 나라 사랑의 얼, 불의에 굽히지 않는 기개, 청렴과 고결함, 그리고 박애주의와 인도주의(humanism)였다. 이것들은 다른 데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배움이었고,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정신이었다.


내 연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그립고 아쉬운 게 두세 가지 있다.


하나는 사라진 백양로와 숲이다. 굴다리에서부터 Underwood 동상 앞까지 뻗은 백양로는 우리에게 철학의 길이었고, 울창한 숲은 낭만의 쉼터였다. 백양로를 걸으며 우리는 사색을 했고, 꿈을 키웠다. 숲 속에서는 짝사랑을 하고, 서클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숲이 그 안의 어느 벤치에 앉아도 해가 드는 덤불이 되어버렸다. 대학의 발전과 팽창에 어쩔 수 없이 희생된 것이리라.(혹자는 학생들의 음란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숲을 솎았다고도 한다. 요즘 학생들은 우리처럼 순진하지가 않은 모양인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아프리카와 브라질 등지에서 벌목을 하면 원주민과 야생 동식물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백양로와 연세숲의 벌목은 학생들의 사색과 낭만을 앗아가지 않았을까?


또 하나 그립고 아쉬운 것은, 지금 대학 본부가 들어앉은 옛 인문관이다. 빨갛게 물든 담쟁이가 가을 햇살에 나부낄 때면, 우리의 넋이 승화되던 건물이다. 우리는 이 건물에서 수업을 받았다. 이 고색창연한 건물의 방마다, 삐걱거리는 마루와 어둑한 구석마다, 최현배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얼과 숨결이 깃들어 있다. 그런 교실에서 수업을 해야, 그분들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건물을 행정부가 빼앗아 가다니. 정말 아쉬운 일이다.


또 아쉬운 것은, 남녀의 비율이다. 우리 땐 한 학년의 30여 명 중 여학생은 네댓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천진하고 천치였고 천박했던 내게 무슨 가능성이 있었겠는가? 그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83년에 객원교수로 갔을 때 보니까, 100여명 반이 거의 다 여학생이고 남학생은 여남은도 안 되지 않는가. 남학생들이 꽤 부러웠다. 나도 이럴 때 학교를 다녔더라면, 나 같은 추남에게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부러운 것은 이뿐이 아니다. 우린 그때 동급 여학생들에게 경어를 썼으며, 그들 앞에서 수줍어했다(그래서 그들을 선배나 타과 학생들에게 빼앗긴 듯하다).  그런데 84년 봄 내가 교정에서 엿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는 나를 흐뭇하고 부럽게 했다. 남학생 1이 한 여학생에게 남학생 2를 가리키며,


“얘, 이 친구 조심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정신 안 차리면 다쳐.”


라고 하니까, 여학생의 대답,


“걱정 마. 얘는 도끼를 손에 쥐어주고 찍으래도 안 찍을 애야.”


이 얼마나 순수하고 재치 있고 남녀평등한 대화인가? 요즘 후배들이 부럽기 짝이 없다.


슬픈 기억도 있다.


1990년 초반의 어느 크리스마스에 무슨 학회 참석차 막 통일된 독일 베를린에 간 적이 있었다. 묵고 있던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졸업하고 처음 무려 30여 년 만에 동기생 방찬영을 만났다. 반갑기 그지없었다. 카자크스탄 공화국 대통령의 경제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데, 가족과 같이 휴가를 나왔다면서 부인과 두 딸을 소개해 주었다. 그런지 몇 해 후, 일리노이에서 어느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한국에서 온 며칠 묵은 신문을 보게 되었는데, 방찬영의 큰 딸이 결혼하게 되어, 모든 가족이 서울에 나왔었는데, 부인과 두 딸이 혼수감을 사기 위해 삼풍백화점에 들렀다가, 모두 참변을 당했다는 기막힌 기사를 읽게 되었다. 너무 놀랍고 슬픈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은 이렇게 무상하고 무의미하고 우연에 좌우되는 것인가? 베를린에서 그들을 소개받았던 장면이 자꾸 떠오르며, 한동안 잠자리를 설쳤다. 방찬영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 그때 못했던 애도의 정을 지금 표한다.


속담대로 세월은 화살같이 흘러서, 대부분의 동기들은 이제 70줄에 들어섰다. 간단한 도치 공식으로 71을 17로 바꾸면 곧 다시 연세대에 들어갈 수 있겠다! Goethe의 Faust가 Marguerite와 사랑하기 위해 다시 젊어지고 싶어서, 사탄 Mephistopheles에게 영혼을 팔았다는데, 나도 내 영혼을 팔아서 다시 한 번 젊어져 볼까? 그러나 이렇게 더럽게 감염된 혼을 누가 사느냐고 단번에 퇴짜 맞을까 봐 겁이 나서 내 놓지도 못하겠다.


올해가 병술년이란다. 술을 병으로 마시는 해라는 뜻이리라!? 이 해가 저물기 전에, 아니 동기들의 황혼이 저물기 전에, 그들과 술병을 나누어야지 하고 다짐해 본다. 연세 영문과의 끊임없는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며, 2006년 병술년 초에. 김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