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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자 유전체에 새겨지는 삶의 흔적
작성일
2020.08.18
작성자
시스템생물학과 관리자
게시글 내용

2016-04-19


부모로부터 물려 받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유전자, 재산, 사회적 지위, 종교, 정치성향 등등. 이들 중 좋거나 나쁘거나 선택의 여지 없이 받아야 하는 것은 유전자뿐일 것입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자식에게 전달되는 유전자조합은 무작위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부모는 나쁜 조합이 자식에게 전달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뿐이지 책임에서는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최근 후성유전학(epigenetics) 연구결과는 일정 부분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 개체의 삶에서 유전자의 쓰임새에 대한 기록이 유전자 자체 또는 그 부속물질에 새겨집니다. 이를 ‘후성유전표지(epigenetic marks)’라 하며 유전 정보 DNA 코오드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고 그냥 덧칠한 셈으로 치면 됩니다(유전자 정보에 변화가 생긴 것은 돌연변이라 함). 대체로 일정 기간 동안 쓰임새가 없다고 판단되는 유전자에 메틸기(가장 간단한 유기 화합물)로 표지 한 후에 창고에 넣어둡니다. 그러한 유전자 중 많은 것은 필요에 따라 꺼내 쓸 수 있지만 어떤 유전자는 한 구석에 처박혀 평생 쓰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후성유전’이라 함은 이러한 유전자표지 자체 또는 표지가 매겨지는 상황이나 효과가 다음세대로 전달되는 현상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성유전표지는 개인마다 접하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한 개인이 경험한 삶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상 살아가면서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는 가설은 1900년도 초기에 폐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전체 재편성(genomic reprogramming) 과정이 밝혀지면서 아예 재조명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우선 이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지금 당장의 F0세대는 살아가면서 정자나 난자 유전체에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자와 난자가 만나 F1접합체를 이루면 그들 유전체에 남겨진 F0 세대의 흔적을 지우고 F1용 유전자 쓰임새 프로그램을 새로 돌립니다. 이를 수정 후 재편성(post-fertilization reprogramming)이라 합니다. 이 과정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F0부모의 생식세포에 남겨진 흔적이 F1자식에게로 건너갈수는 없겠죠. 그러나 어느 물리화학적 과정이건 100% 성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수정 후 유전체 재편성 과정을 능동적으로 피해가는 기제도 있습니다. 부모 자신이 배아 상태였을 때 앞으로 정자나 난자를 만들 생식계열(germline)세포에 남자배아는 남성의 기득권을, 여자배아는 여성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유전자에 메틸화 표지를 해둡니다. 이를 유전체 각인(genomic imprinting)이라 하며, 각인표지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이후에 일어나는 유전체 재편성 과정에서 제외됩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배아였을 적이 아니라 독립된 개체로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식세포에 새겨놓은 표지도 수정 후 일어나는 유전체 초기화 과정의 검열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비록 낮은 빈도라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부모세대의 삶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자식 세대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지난번에 소개한 학습된 공포감이 손자 세대까지 전해지는 경우입니다. 전달의 주체는 정자였고,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냄새에 특이적인 수용체 유전자에 새겨진 학습의 흔적 즉, 낮아진 메틸화 정도였습니다. 이 상태가 수정 후 재편성 과정에서 원상 복귀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전해진 것이죠. 이러한 후성유전표지의 차세대 전달은 여러 동물실험 결과에 의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어떠한가요? 지금까지 개연성이 있을 뿐 증거는 없었습니다. 더욱, 한 개인의 삶의 흔적이 생식세포 유전체에 기록된다는 사실도 밝혀진 바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올해 1월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과학자들은 아빠의 비만상태의 흔적이 DNA 메틸화로 정자 유전체에 새겨지며, 그 정자에는 마른 사람의 것과는 다른 유전체 쓰임새를 조절하는 분자들이 남아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코펜하겐 과학자들은 고도비만 남성을 대상으로 위의 일부를 잘라내어 음식섭취량을 줄이게 한 후, 시간 별로 그들 정자의 후성유전표지 변화를 추적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수술 전에 비해 단 1주일 만에 유전자 1,500여개에서 메틸화 표지가 달라졌으며, 그 중 1,000여개는 1년간이나 그 표지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한 유전자에는 식욕 조절 등 뇌의 발달과 분화에 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성인 남성은 날마다 수천만 마리의 정자를 생산합니다. 아빠의 건강상태가 1주일 만에 그야말로 실시간으로 정자 유전체에 반영된다는 이야기죠.

한 역학조사에 의하면, 비만 아빠의 자식들은 어른이 되어서 당뇨, 심혈관 질환을 포함 여러 대사성 질환에 잘 걸린다고 합니다. 또한 엄마의 식습관이나 체형과는 하등 상관없이, 아빠 쪽 가계 특히 할아버지의 건강상태가 직계손자의 건강에 까지 영향을 준다는 스웨덴과 영국에서 진행된 코호트**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코펜하겐 과학자들은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인지라 정자에 새겨진 비만의 흔적이 자식에게로 전달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줄 수 없었지만, 이러한 역학연구 결과들을 감안하면 그러한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옛날 사대부 집안에서는 혼인기약을 맺을 때 상대집안의 증조 할아버지 이력까지 알아 보았으며, 부부가 합방을 할 때는 길일을 정하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었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죠. 우리 선조들은 현명하게도 자식세대로 전해질 수 있는 후성유전표지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았을까 합니다.

* Donkin et al. Obesity and Bariatric Surgery Drive Epigenetic Variation of Spermatozoa in Humans. Cell Metabolism 23: 1-10, 2016

**코호트(cohort), 특정한 기간에 태어나거나 결혼을 한 사람들의 집단과 같이 통계상의 인자를 공유하는 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