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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인병의 태아유래 가설: 잘 먹기, 제1의 가치
작성일
2020.08.18
작성자
시스템생물학과 관리자
게시글 내용

2016-06-21


한 개인의 특정 질환에 대한 취약성은 유전자–환경 상호작용의 결과입니다. 환경 요인으로 장내미생물 집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유전적 소인이 불분명한 비전염성 질환 발병의 주요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앞서 소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한 개인이 특정 비전염성 질환에 잘 걸리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태아시절 엄마의 자궁 환경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성인병의 태아유래가설(fetal origins of adult disease, FOAD)을 소개합니다.


1990년 초 Baker 박사는 영국 어린이의 출생기록을 분석하여 저체중으로 태어난 아기는 커서 비만 당뇨 등 대사성 질환과 고혈압, 관상동맥질환에 잘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FOAD 가설을 발표합니다. 이후 이 가설은 많은 동물 실험과 사람 대상 역학연구, 특히 『네덜란드의 배고픈 겨울(Dutch Hunger Winter)』이라고 알려진 비극적인 사건의 영향을 분석하면서 힘을 받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말미 나치 점령하에 있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포함한 서부지역에 물자공급이 1944년 11월 초부터 다음해 5월까지 7개월간 끊어져 400만 명이 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됩니다. 물자공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4개월 동안은 나이, 성별, 건강상태, 사회경제적 계층 구분이 없이 하루 권장 칼로리의 4분1 수준인 400-800 kcal 정도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과학자들은 엄마의 영양상태가 임신기간별로 태아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그 아기들이 자라면서 앓게 되는 각종 질환과의 상관성을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손자세대에서도 나타나는 영향을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네덜란드 기근사건은 마치 잘 설계된 듯한 대형 코호트 실험처럼 되어 FOAD 관련 많은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태아발달 초기에 영양부족을 경험하면 태아의 신진대사는 반 영구적으로 절약 · 비축 모드로 바뀝니다. 이를 절약표현형 가설(thrifty phenotype hypothesis)이라 하며, Baker 박사가 FOAD 현상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생리적인 측면에서 엄마의 영양이 부족하다 보니 태아에게 포도당이나 아미노산 공급이 제한됩니다. 태아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엄마로부터 받는 혈액량이 늘어 나도록 조종하여 거기에 녹아 있는 포도당을 빨아들이고, 여분이 있다면 나중을 대비하여 비축합니다. 그러한 생리변화는 영양이 충분한 조건에서는 비만과 여러 대사성 질환을 유도합니다. 태아의 생리는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재편성되는데, 에너지원을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기관인 뇌에 최우선으로 공급하고 근육 같은 다른 신체기관의 발달을 제한합니다(fetal programming). 이는 태아가 생존을 위해 택한 적절한 적응이지만, 나중에 그 값을 치르게 됩니다. 일단, 근육량이 줄어 저체중으로 태어나게 되며, 심장근 발달에도 문제가 생겨 심장질환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췌장 발달에 제약이 있게 되면 인슐린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결국 비만과 당뇨로 진행됩니다. 뇌신경망 발달에도 문제가 될 수 있겠죠. 실제로 네덜란드 기근을 임신초기에 경험했던 태아는 크면서 대사성 질환, 심혈관계질환, 조현증(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정신분열증을 대신하는 병명) 등에 취약했음이 드러났습니다. 한편, 태아시절 기근을 경험했던 여자아기는 커서 자식을 더 일찍 더 많이 낳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녹녹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현재 자신의 몸을 유지하고 보수하기 보다는 생식에 투자하여 나중을 기약하는 태아 때의 생리적 적응의 결과입니다. 문제는 생식에의 투자가 빠르면 몸이 부실해지고 노화가 일찍 진행됩니다. 그 태아 집단이 65세가 되었을 때 노화에 따른 인지능력을 조사한 결과, 그들의 인지능력이 기근을 경험하지 않았던 동세대 사람들에 비해 훨씬 빠르게 쇠퇴하고 있음이 보고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인병 태아유래가설은 얻는 것이 있으면 잃어버리는 것도 있다는 맞교환(trade-off) 개념이며, 한 개체의 생활사 진화(life history evolution) 전략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습니다. 태아 때의 영양결핍과 마찬가지로 그 때의 영양과잉도 나중에 댓가를 치릅니다. 임신 중에 엄마는 태아와 포도당을 가지고 다툼을 벌입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뱃속에 있는 태아가 전부는 아닙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다음 임신도 고려하면 현재의 태아에만 올인할 수는 없죠. 반면, 태아는 자신이 전부이며, 엄마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포도당 분배에 조정이 필요한데, 엄마는 인슐린을 분비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포도당을 먼저 챙기고 나머지를 태아에게 줍니다. 한편 태아는 엄마의 인슐린 작용을 억제하는 호르몬을 분비하여 될 수 있으면 포도당을 자기 쪽으로 더 많이 당기려고 합니다. 임신엄마의 혈중 포도당 농도는 낮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혈당이 높게 나온다면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친 태아 승 엄마 패인 것입니다. 엄마가 영양과잉이거나 당뇨일 경우에는 혈당이 높습니다. 엄마의 췌장이 이를 알아채고 인슐린을 분비하여 근육이나 지방세포에게 혈액 내 포도당을 빨리 먹어 치우라고 명령하는데 이들은 이미 많이 먹었기에 그 명령을 무시합니다. 이를 인슐린 저항성(insulin resistance)이라 합니다. 엄마의 혈당은 계속 높은 상태에 있게 되고(hyperglycemia), 태아의 혈액에도 당이 많아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태아의 췌장은 인슐린을 분비하여 당을 지방세포에 저장합니다. 하지만 태아의 지방세포가 당을 먹어버려도 계속 엄마로부터 공급되기에 태아는 인슐린을 계속 만들어 냅니다. 결과로 태아는 고인슐린증(hyperinsulinism)을 격게 되고, 몸집이 비정상적으로 커집니다(fetal macrosomia). 용케 비만 엄마가 관리를 잘하여 아기가 태어났다 하더라고 이러한 생리적 충격은 나중에 대사성 질환과 심혈관계 질환 등 여러 합병증의 원인이 됩니다. 엄마의 영양이 모자라도 문제 남아도 문제입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50세였습니다. 지금은 80세 입니다. 우리는 50년전 보다 한참 더 오래 살지만 더 건강해 졌나요? 우리는 두 세대 이전 부모세대 보다 비전염성 질환에 훨씬 취약합니다. 내가 받은 유전자 조합에 질병 취약성 유전자가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특정 질환의 취약성 유전자는 그저 말 그대로 취약성을 나타낼 뿐 그 질환에 꼭 걸린다고 할 수 없습니다. 환경 요인과 죽이 맞아야 비로소 그 질환에 걸립니다. 환경에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장내미생물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자궁 내 환경입니다. 건강한 삶을 살고 그 건강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제대로 잘 먹음으로써 이 두 환경을 잘 조성하는 것입니다.